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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이 한 때 무척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일본 소설은 왠지 정이 안 가 (스타일이 나랑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안 읽고 영화로 봤다
아주 재미없었다
진혜림이 예쁘다는 생각만 했다
그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소설을 읽게 됐다
제목에 우선 끌렸다
"낙하하는 저녁"이라...
"울 준비는 되어 있다"처럼 제목 짓는데 대단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첫 도입부는 괜찮았다
툭툭 끊어지듯 묘사하는 서술 스타일이 신선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이야기의 힘을 잃고 방황한다
줄거리의 축이 없다고 해야 하나?
특히 하나코의 자살 장면에서는 좀 황당했다
왜 죽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혹은 개연성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실망스런 결론이다
꼭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툭툭 끊어지는 서술들, 일정한 줄거리가 없이 그저 주인공 마음대로 흘러가는 전개, 그리고 늘 황당하리만큼 어이없는 결론들
플롯이 사라진 것도 현대 소설의 특징인가?
혹자는 CF를 보는 듯한 영상미에 치중하는 소설들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
하나코란 여자에 대해 좀 더 개연적인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일상을 스케치 하듯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독자에게 아주 부족하다
하나코라는 캐릭터에 전혀 공감이 안 간다
마지막에 자살한 걸 보고 혹시 친동생을 사랑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결국 죽음으로 끝을 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대한 작가의 해설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또 나카지마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다
그저 막연히 하나코의 뒤를 봐 주는 후견인 비슷하구나, 느낄 뿐이다
다만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애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15개월에 걸친 실연"이라는 광고 문구가 마음에 와 닿는다
1년을 사랑하면, 그 배가 되는 시간이 흘려야 비로소 이별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익숙해진 신경 회로의 고리를 끊는데 꽤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이란 느낌에 속지 말라는 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문자를 보내고, 만나서 영화를 보고, 전화하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들에 얽매여 그 상대가 없어질까 봐 헤어짐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리카가 8년 동안 함께 산 다케오를 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15개월이 안쓰럽다
그렇지만 참 용감하게 잘 이겨낸다
지나친 비련에 빠지지 않고 자기 생활을 견지하면서 비교적 꿋꿋하게 견뎌 나간다
하루 쉬라고 하나코가 권했을 때, 단 하루라도 쉬게 되면 영영 일상의 궤도를 일탈해 버릴 것 같다고 굳이 휴가지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마지막에 하나코가 죽은 후 다케오네 집에 찾아가 그에게 덤비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확실히 일본은 섹스에 자유로운 것 같다
리카는 거의 다케오를 강간하려고 하는데, 럭비 선수 출신인 남자를 강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남자들은 섹스의 본능에 대해 누누히 강조하지만, 막상 하고 싶지 않을 때 여자가 덤비면 아주 싫은 모양이다
(문득 강간당할 때 너도 즐기지 않았냐는 뻔뻔한 놈들의 얼굴을 갈겨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리카는 그렇게 거절당한 후 비로소 다케오를 마음에서 접는다
이제 정말로 그를 잊은 모양이다
다케오가 단 사흘 만에 반한 하나코와 (리카와는 8년을 살았는데) 리카가 함께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 봤다
거의 남편이나 다름없던 남자의 새로운 애인과 한 집에 산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하나코의 캐릭터를 미루어 보면 충분히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데, 만약 이런 독특한 여자라면 나도 제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하나코가 정작 다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케오가 가엾어 마음아파 하던 리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너무 사랑하면, 비록 내가 버림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가 행복하길 바랄 수 있는 법이다
나의 비참함은 그대로 놔 두고, 그의 불행에 가슴아파 할 수 있다
꽤나 인기가 있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도 된 모양인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15개월에 걸친 이별 과정은 공감이 간다
(물론 진짜 이별은 단 사흘 만에 결정됐지만, 마음으로부터의 이별은 길었다)
리카처럼 실연을 견디는 순간들을 담담히 글로 써 간다면 조금은 편하게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