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를 위한 변명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부어스틴이 쓴 "이미지와 환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위대한 문학 작품의 명성은 다 알고 있고 수없이 인용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베스트셀러와 고전의 차이는 사람들이 읽느냐, 읽지 않느냐의 차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지적처럼, 카뮈는 흔히 회자되는 작가이면서도 정작 그의 작품인 "이방인"이나 "페스트" "반항인" 등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을 쓴 저자의 말처럼, 위대한 작품을 어렵게 해석함으로써 먹고 사는 평론가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평범한 독자인 나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카뮈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평론집을 집어 들었다

적어도 저자 박홍규는, 복잡하고 난해한 말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노벨상 수상자 혹은 프랑스 문학의 대가라는 점 때문에 무조건 찬양되고 숭상되는 우리 평론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고 싶어 한다

 

제목은 "카뮈를 위한 변명"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저자는 카뮈에게 씌워진 지나친 찬사를 벗겨 내고 그 안에서 인간 카뮈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첫 장에서 저자는 알제리와 식민 조선의 비교를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카뮈의 식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어찌보면 참 위험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이며, 온통 그에 대한 찬양 일색인 우리나라 주류 평론가들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증법의 논리대로 참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명제에는 반드시 반론이 따르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상이라도 제발 이런 기본적인 법칙은 수용되었음 좋겠다

세상에 100% 완전무결한 게 도대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저자는 카뮈를,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일본 작가로 비유한다

일제가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를 참조한 것만 봐도 상당히 적절해 보인다

식민지 조선에 태어나 자랐고 조선의 자연을 사랑했음에도, 정작 식민지인으로서 느껴야 할 조선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작가의 소설에 어떤 조선인이 감동할 수 있겠는가?

카뮈는 할아버지 때부터 알제리로 이주해 젊은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낸 만큼, 알제리의 자연을 사랑하고 평생의 고향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소설에서 식민지인 알제리 국민이 느꼈을 고통과 억압에 대해서는 일절 서술하는 법이 없고, 알제리가 독립 전쟁을 치룰 당시도 그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독립을 반대한다

이런 카뮈의 작품은 당연히 알제리에서 금서 목록에 올랐다

우리 역시 일제 치하의 식민지를 경험한 이상, 제국주의자인 프랑스 보다는 식민지 알제리에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평론가들은 그저 카뮈를 일방적으로 찬양하기만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저자는 통탄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강대국 프랑스와 동일시하고, 예술과 자유와 평등, 인권의 나라에 대한 동경심에 비롯된 문화 사대주의가 아닌가 의심한다

흔히 프랑스 하면 떠올리는 문화의 나라라는 이미지도 실은 파리의 일부 상류 계층에 국한된 것이고, 우리는 지나치게 큰 환상에 쌓여 있다고 꼬집는다

문득 최연구가 쓴 "프랑스 문화 읽기"가 생각난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연구는 미국 자본주의와 대립되는 프랑스의 위대한 문화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고, 미국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사대주의 의식을 비판했는데 정작 그 역시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 냄새를 풍긴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화, 세계화는 좋지만, 미국 대신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 문화가 대장이 되는 것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찬양이나 비판은 지양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 같은 비판 방식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히려 정말로 카뮈가 원했던 것, 진짜 카뮈의 모습을 찾길 바란다

실제로 카뮈는 꽤 잘 생겼다

험프리 보가트를 평생 좋아했다고 하는데, 나란히 배치한 사진을 보니 세계적인 영화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준수한 외모다

더구나 노벨상을 탈 만큼 글도 잘 쓰고 프랑스의 지성인이라 인정받았으니, 여자들이 많이 따를 법 하다

카뮈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지, 수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

절대 못 끊는 게 있다면 담배와 섹스(혹은 사랑)였다고 하니, 그의 성향을 알 만 하다

결혼하지 않고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 상태에서 자유로운 사랑을 나누던 샤르트르와는 달리, 결혼한 상태에서 간통한 셈이 된 카뮈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고 싶으면 샤르트르처럼 결혼이 주는 안정과 특혜도 거부해야 "양심에 꺼리끼지 않는" 게 아닐까?

민중의 자유와 인권을 논하면서도 정작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는 간통으로 인한 끊임없는 괴로움을 주는 이중적인 심리 구조를 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아내 역시 십 여살이나 어린 아름다운 여배우였던지라, 카뮈도 아내 마리아를 둘러 싼 남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저자는 카뮈를 아나키스트로 본다

아나키스트란 무정부주의자라기 보다는 권력과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로 보는 게 옳다고 한다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의 지배를 지지한 것도 아니다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이 모두 화합하여 국가의 지배가 없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자고 했다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저자의 표현대로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 함께 사는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카뮈는 자신이 낳고 자란 알제리의 현실에 너무나 둔감했다

늘상 옆에서 지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민지인으로 겪어야 할 알제리인의 고통과 억압에 항상 무지했다

그의 소설 "이방인"을 봐도 태양 때문에 무심코 저지른 살인의 희생자 알제리인에 대해서 어떤 묘사도 없다

 

카뮈가 식민지 알제리에 대해 어떤 문제 의식도 안 가졌던 것처럼, 그는 조국 프랑스에 대해서도 별다른 자부심을 갖지 않았다

프랑스는 그저 우연히 태어난 곳일 뿐이다

카뮈는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옹호하는 신념에 따라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고,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한다

물론 공산주의가 더 큰 억압을 가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령에 반항하다 추방당한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찬미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려고 입대하나, 결핵 때문에 거부당한다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확실히 카뮈는 권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부르주아 속성을 비판한 비공산주의 좌파였던 모양이다

샤르트르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이 속한 계급의 모순을 깨닫고 좌파 지식인의 선봉에 섰던 것과 달리, 카뮈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 주는 괴로움을 내적으로 승화시켜 노동자 편에 선 인물이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처럼,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 선 사람은 반드시 그 내부에 극복하지 못한 콤플렉스가 자리잡기 마련이다

저자는 표현은 안했지만, 카뮈보다 샤르트르를 더 높게 평가하는 듯 하다

 

연극을 사랑한 카뮈는 여러 소설을 각색하고 연출했으며, 스스로 배우가 되기도 하고 연극의 여주인공들과 실제로 사랑을 나눈다

문학이 지배자로 군림하려고 하나, 실상 허공에 군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연극이야 말로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대등한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다고 예찬한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사회는 바로 이런 평등한 공동체, 혹은 권력과 억압이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연극 같은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연극에서나 가능한 이상향일 뿐이지만 말이다

 

300페이지가 채 못되는 길지 않은 평전인데, 역시 위대한 작가의 평전이라 쉽지는 않다

비교적 저자가 쉽게 풀어 쓰긴 했지만, 카뮈가 나타내려고 한 부조리한 세상의 고발이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방인"과 "페스트"를 새롭게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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