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과 의료권력 나남신서 531
조병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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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개혁은 직업적인 이유로 늘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적절한 책을 찾기 힘들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는데, 많지 않은 분량에 핵심을 잘 집어낸 좋은 책이다

(우수 학술 도서에 선정됨)

의료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의사들이나, 시민 단체가 참조해 볼만 하다

 

이 책의 배경은 2000년에 벌어진 초유의 사건, 의사 파업이다

국민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의사들이 파업을 벌였다는 도덕적인 충격 보다는, 기득권층이라 여겨 온 전문가 집단이 정부에 반발해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훨씬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당시 의사들을 지지하는 사회 세력은 거의 전무했는데, 다만 변호사 협회가 전문가들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저자는 의사들의 척박한 의료 환경을 옆에서 지켜 보는 간호사나 병원 노조들이 왜 그들의 파업에 동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만약 그들이 의사들의 파업에 지지 성명을 냈다면, 집단 이기주의라는 도덕적 비난의 차원을 넘어서 의료계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인식했을 거라며 아쉬워 한다

 

의사들이 저수가 정책에 시달리며, 약가 마진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지를 맞출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의사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무조건 의약 분업만 시행하려 든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런데 저자는 근본적인 문제를 의료 환경의 변화로 본다

지금까지 의사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질병 치료에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러 왔다

특히 생의학을 바탕으로 한 서양 의학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면서, 환자들은 치료에 소외되어 갔고 더욱 전문적이고 복잡한 치료가 최선의 치료라 각광받았다

그러므로 의사들은 의약 분업을 논의하는 자리에, 동네 슈퍼 아줌마나 주유소 아저씨가 왜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인의 의학적 지식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변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는 갈수록 탈권위적인 사회로 변모해 간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정보가 공유되고 이제 환자들은 의료에 있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의학 분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문가 집단은 사회의 개방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권위를 내세우며 전문성을 근거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일반인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게 됐다

이것이 의사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열린 의료란 어쩌면 패러다임의 전환일지도 모른다

의료 행위의 결정 과정에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의 의견을 참조해야 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에 대해서도 수용할 것을 요구하니, 어찌 보면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훼손시키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그것이 대세라면 결국 어떤 방향으로든 수용해야 살아 남을 것이다

현재와 같이 의사가 치료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생각으로는,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서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미국은 이미 열린 의료를 지향하며, 대체의학 등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다고 한다

 

의사 파업을 바라보는 저자의 독특한 시각은, 의사와 병원의 분리다

그 동안 정치에 무관하고 진료실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아 온 의사들이 한꺼번에 파업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 의사라는 신분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고 본다

즉 같은 의사라고 동지 의식을 갖은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병원 자본과 프롤레타리아 의사를 구분한다

과거 한국은 의사가 소자본으로 자기 진료소를 운영하는 방식이 대세였는데, 정부가 민간 부문에 의료 사업을 의존하면서 급속도로 의료 자본이 성장하게 된다

의사들이 영리 목적으로 일하면서도 탈자본화를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분업이었는데, 병원 자본이 대량 도입되면서 자체적인 견제가 불가능해진다

의료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면 의사들은 자기 영역 환자만 보고 그 외는 다른 병원이나 상위 체계로 넘긴다

말하자면 동료 의사나 병원과 보완재 관계이지, 대체제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종합병원이 이익 창출을 위해 외래 환자 유치에 나서면서 (이것은 전국민 의료 보험과 저수가 정책에 원인이 있다) 동네 의원과 경쟁 관계에 놓인다

큰 병원과 전문 의료진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특성상, 의사 개인이 자본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종합 병원은 전공의 선발권이나 의료 환경의 높은 위상을 위해 대학 병원으로 승격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 노력이 신설 의대 설립을 유도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의료 개혁이 종결되면 의사들의 계층 분화가 이뤄질 것이라 예상한다

사실 이것은 새삼스런 주장도 아니다

자본을 소유한 의사와 그렇지 않은 의사의 분화는 이미 "부자 의사, 가난한 의사"의 구분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

의사가 자본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1차 의료 기관을 살려야 하고, 그것이 의료비 상승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주지시킨다

병원의 외래 환자에 대해서도 의약 분업을 실시한 것이 그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의료 전달 체계를 확립하여 병원이 의원과 경쟁하는 것을 최소화 시키라고 한다

전문의와 큰 병원, 고가의 검사 기구에 집착하는 국민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현대가 self care의 시대임을 지적한다

이미 미국에서는 자조 집단이 활성화 되서 이 집단의 컨설트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도 생겼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알콜 중독자의 모임인 AA일 것이다

(이 단체의 효과는 정신과 교과서에도 나온다)

출산을 질병이 아닌, 인체의 자연스런 발달 과정으로 인지해 병원이 아닌 집에서, 의사가 아닌 가족의 주도 하에 분만하려는 노력도 TV에 자주 소개된다

저자는 비아그라나 폐경기 후 호르몬 복용 등을 예로 들면서 의학이 생활을 지배한다고 걱정한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질병이 아닌 자연스런 노화 과정이었는데, 이러한 생활약물이 등장하면서 개인의 일상을 의료 권력이 통제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에서도 읽은 내용이지만 생활 약물은 (life drug) 개인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준다

이제는 질병이 아니더라도 사는 데 불편한 점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화 연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질병의 치유 보다 예방이 더 중요시 되는 현대의 건강 수준을 만족시키려면 생활 약물의 개발은 당연한 수순이라 본다

 

외부에서 바라 본 의사 집단에 대한 분석을 읽으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열린 의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교과서적인 진료 요구에 깔려 있는 "부권적 전문주의"를 읽어 낸다

사실 모든 과학이 갖는 불확실성이라는 한계를 인정한다면, 열린 의료는 실수를 줄이기 위한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지만, 어쨌든 이론은 그렇다)

특히 저자는 의료 행위에 있어 의사가 유일한 주체가 아니며, 환자는 물론 약사, 간호사, 의료 기사, 대체 의학 등등 기타 집단과의 상호 협조를 요구한다

주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으나 유일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타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냉정하기 마련이다

변해 가는 의료 환경에 적응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환자 치료에 임하기 위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중요한 문제들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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