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의 프랑스 문화 읽기 - 프랑스는 왜 반미인가
최연구 지음 / 중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부제목 "프랑스는 왜 반미인가"는 책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라는 국가, 혹은 사회 공동체가 갖는 문화의 우수성을 예찬하고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거부하는 문화적 자부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정치 경제학을 전공해서인지, 단순히 가벼운 문화 소개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내부 사회에 대해 꽤 깊은 분석을 제공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프랑스의 음식 문화나 샹송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도 빼놓지 않는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저자는 세계화라는 개념부터 비판을 하는데, 김영삼 정부가 유일하게 성공한 정책이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과 바로 이 세계화라는 개념을 "globalization"이라는 영어 대신 "segyewha" 라고 표기한 것이라는 풍자로 시작을 한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화란 그저 미국 중심의 세계화로 무조건 미국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그들의 언어를 익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는 프랑스가 유럽, 혹은 전 세계 차원에서 얼마나 중요한 국가이고 그 문화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자세히 논증한다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른 문화권의 우수함을 대비시킬 때 제일 짜증나는 태도가 극단적인 찬양이다

서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그 나라의 제도나 문화 등은 절대적 우수성을 갖는다는 식으로 기술하면 일단 거부감부터 든다

그래서 요즘은 가능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대신, 그 나라 사람이 직접 쓴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맞벌이의 함정"이다 미국 학자가 보는 미국 사회의 분석은 아무래도 몇년 거기서 머물다 온 유학생들보다는 훨씬 우수하다)

 

프랑스어가 영어 못지 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예로 유엔에 전화를 걸면 안내원이 불어로 대답한다는 식의 예까지 등장하니, 좀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마치 프랑스 사회가 민주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는 양 기술하고, 상대적으로 미국 문화의 보수성과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건 완전히 흑백논리 아닌가, 싶었다

어떤 의미로든 미국은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세계화의 상당 부분은 미국식으로 표준화된 양식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국제어로서 영어의 위상은 프랑스어와 비교되기 힘든 게 사실이지 않은가?

저자는 프랑스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특파원으로 파리에 오는 사람 정도는 불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영어 배우기로도 벅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세계화를 위해 프랑스어까지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곧 이 책이 그렇게 만만한 책은 아님이 밝혀진다

저자가 주장하는 프랑스 문화의 우수성과 보편성은 프랑스 시민 혁명의 3대 이념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간데서도 볼 수 있다

자유,평등,박애 이 세 가지 이념이 전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됐다는 것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바 있다

사실 자유와 평등이야 익히 알고 있는 개념인데, 박애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단순히 봉사 정신 내지는 남을 사랑하는 정신 정도가 아닐까 추측했는데, 보다 확실한 의미를 알게 됐다

저자는 박애를 연대주의로 표현한다

제일 흔한 예가 파업에 대한 시민과 언론의 반응이다

(이 예는 프랑스를 소개하는 책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이를테면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단 신문에서 시민의 발이 묶여 얼마나 불편한지를 먼저 보도한다

지하철 파업으로 불편을 겪는 시민들의 모습과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면서 일단 파업이 나쁘다는 식의 이미지를 심어 준다

연이어 불법 파업 어쩌고 하는 식의 정부 발표가 이어지고, 시민들을 위해 하루 속히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고 몰아세운다

정작 왜 그들이 파업을 했는지에 관한 심층적인 기사는 보기 힘들다

(이런 식의 선정 보도는 의약분업 당시 파업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왜 의사들이 극단적인 행동까지 가게 됐는지에 대한 분석 대신, 맨날 뉴스에 나오는 건 환자가 죽어간다는 선정적인 보도 뿐이었다 혹시 기자들이 문제점을 분석하려면 너무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니까 적당히 시민들 몇 인터뷰 해서 뉴스 시간 땜방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다)

이런 식의 선정 보도가 계속되면 국민들은 왜 노조가 파업을 했는지,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대신 파업 자체가 집단 이기주의라 생각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빨리 지하철이나 정상 운행 됐으면 바라게 된다

 

반면 프랑스에서 파업은 연대주의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경우 시민들은 그 불편을 감수하고 지지를 보낸다

심지어 대체 인력 투여도 불법으로 본다

불편을 겪게 함으로써 실력 행사를 하는 것인데, 정부나 회사 측에서 대체 인력을 투여해 버리면 파업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하철 파업 당시 파리 시민들은 센 강의 유람선을 이용해 출퇴근 했다고 한다

무려 2개월이나 지속된 이 공기업 부문의 파업이 가능했던 까닭은 시민들이 그들의 실력 행사를 지지하고 언론이 여론을 정확히 보도해 줬기 때문이다

저자는 "솔리다리테"라는 이 연대 의식을 "톨레랑스"와 더불어 프랑스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똘레랑스야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워낙 유명해진 개념이라 (심지어 술집 이름으로도 쓰이더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저자는 관용이라는 것과는 좀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단순히 아량을 베푸는 정도의 관용은 아닌 것 같다

책에 소개된 일련의 사례들을 읽어 보니, 똘레랑스란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해 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알려졌다시피 프랑스에는 좌파와 우파가 공존한다

지난 대선 때 무려 16명의 대통령 후보가 나올 정도로 프랑스의 정치 집단들은 아주 다양하다

(프랑스식 정치의 폐혜는 군소정당의 난립이라고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사상 검열이란 절대 불가능한 단어다

각자의 신념과 사고 체계를 제한한다는 것은 똘레랑스에 대단히 위배되는 일이다

내 신념이 존중받고 싶다면 타인의 신념도 존중해 줄 의무가 있다

여러 난립하는 사상들을 받아 들일 만큼 프랑스 사회가 저력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런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발전하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참 한심하다

아직도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언론이 앞장서서 걸러내겠다고 나선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초록은 동색인데 같은 초록끼리 구별하겠다고 애쓰는 꼴이다

회색과 진회색을 가리는 식이랄까?

분단 국가라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하기 위해서는 제발 그 놈의 사상 검증 좀 그만하자

특히 여론을 선도해야 할 언론에서 앞장 서 한심한 짓을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할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개념은 앙가주망이라는 사회 참여 의식이다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을 계기로 확립된 이 개념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역동적으로 발전시키는 힘이라고 하겠다

빅토르 위고에서부터 앙드레 말로, 사르트르, 에밀 졸라 등 수많은 프랑스 지성인들은 학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다

프랑스의 유명한 석학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노동자 파업 때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노조에게 지지를 보내고, 방향을 충고해 주는 중간자라고 했는데, 바람직한 현실 참여 방법이라 생각된다)

사실 인문학이 책상 위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을 연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옛 제도를 공부하고 책을 읽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식인의 사회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라 할 수 있겠다

언젠가 신문에서 정부의 각료로 대학 교수를 쓰는 걸 비판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반드시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특히 가수들의 사회 참여 의식이 인상적이었다

샹송은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더 큰 매력이 있기 때문에 팝송처럼 세계적인 음악으로 뻗어나가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가수들의 사회 참여는 일반적이라 한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의식이 있다고 해야 할까?

우리 나라 가수들이 외국에서는 가수를 문화 예술인으로 대접한다면서, 딴따라로 밖에 보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곤 하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았음 좋겠다

 

이 외에도 바캉스 개념도 새로웠다

휴가란 단순히 휴식이 아니라 문화를 즐기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휴가라면 잠, 집안일, TV 등으로 시간 때우기에 급급한데 프랑스에서 휴가란 여행을 떠나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주 5일제 근무에, 5주의 유급 휴가를 보장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배경부터가 다르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주 5일제 근무를 시행하는데,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한 휴식의 개념을 넘어 문화를 즐기는 수준이 된다면, 삶의 가치가 훨씬 높아질 것이다

 

경제가 지배하는 날, 군사력이 지배하는 나라, 종교가 지배하는 나라 등, 사회를 움직이는 지배 이념은 다양하다

프랑스는 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한다

어쩐지 다른 지배 이념보다 더 저력이 있어 보인다

프랑스가 경계하는 것은 세계화가 미국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지키려고 애쓴다

요즘 유행하는 반미주의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문화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문화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우선이다

적어도 프랑스 문화에서는 "똘레랑스"(다양성의 인정)와 "솔리다리테"(연대 의식), "앙가주망"(사회 참여) 등은 받아들여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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