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보다 재밌는 책이다

일단 인쇄가 칼라로 돼 있고, 총천연색 사진들도 많이 실렸다

보기가 편하다

책값 18000원이 아깝지 않은, 소장용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런데 북디자인은 별로라 처음에는 선뜻 손이 안 갔다

안의 내용처럼 화사하고 세련되게 꾸몄으면 좀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아쉽다

 

두 명의 일본 저자들에 의해 명, 청 시대와 조선 시대가 서술됐는데 사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 동안 조선이나 중국을 각각 서술한 것만 읽어 와서, 두 나라의 관계를 제 3자의 눈을 통해 유기적으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두 나라의 역사를 한 책에 엮었을 뿐 별다른 상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전문가에 의해 쓰여질 게 아니라, 두 나라의 관계를 연구한 한 사람이 저술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각각의 내용들은 만족스럽다

전문가적이지도 않고, 아주 대중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 쓰고 싶었다는 저자들의 바램이 딱 들어 맞는 서술이라 하겠다

(이 수준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전문가들의 어려운 학술서나 대중 취향의 야사 위주의 책 몇 권을 읽어 보면 금방 알게 된다)

 

중국 쪽 역사는 잘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또 저자의 서술 방식 때문에 쉽게 읽히지가 않았다

흥미도 좀 떨어졌다

그렇지만 조선사를 기술한 부분은 잘 아는 분야일 뿐더러, 접근 방식이 이채로워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사를 기술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든다

그는 16세기 양반 사회의 형성을 독특하게 "미암일기"를 통해 서술한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죽기 11년 전부터 임종 직전까지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다

이 일기는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난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유희춘이 과거 합격을 통해 어떻게 명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를 자세히 보여 준다

저자는 16세기만 해도 시골 벽지의 양반도 과거에만 합격하면 얼마든지 명문 거족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 양반이라는 것 자체가 유럽이나 일본과는 달리 세습적인 신분은 아니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을 해서 관료가 되야만 유지되는 가변적인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17세기로 가면서 관직은 한정되어 있고, 점점 서울에 거주하는 소수 가문에서 과거 합격자들이 나오면서 지방 양반들은 소외되어 갔다

그들에게 반대 급부를 주어야 하는데, 향안에 양반이라고 올림으로써 그 지방 내에서 일정한 권리를 행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권리는 군역의 면제이고, 토지 확보나 (주로 간척지 개간) 작은 송사 등에서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부여했다

놀라운 건 그 지역을 벗어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양반이라고 올라 있는 향안이 있는 지역에서만 양반으로서의 권리와 특권이 인정됐다

중앙 관료로의 진출이 막힌 대신, 지방 유지로서의 삶을 보장받은 셈이다

(이 논리는 국사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과 비교했을 때 놀라운 사실은, 조선의 양반들이 과거에만 집중했던 반면 중국은 사대부라 할지라도 상업 등 여러 다른 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제일 궁금한 점이다

과연 중국에도 조선의 양반과 같은 확고한 신분이 있었는가?

명, 청 시대에는 과거 합격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비록 사대부라 할지라도 몇 대에 걸쳐 합격을 못하면 일반 서민과 다름없이 살았다고 한다

조선 역시 후대로 갈수록 양반이 잔반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과거 합격 유무와 상관없이 토지를 소유하고 국가로부터 특권을 인정받았다

어쩌면 유방이나 주원장 같은 농민 출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 같은 유동적인 신분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에서는 농민이 나라를 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중국과 조선의 조공 관계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조선 외에도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많았는데, 의외로 중국은 이민족의 공격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다림을 받았다

원이나 청과 같은 이민족 나라가 들어서는 것처럼, 중국이 강할 때는 조공을 바치고 약할 때는 침략을 받는 식으로 끊임없는 알력 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의 가치를 완전히 내제화시켜 신하의 나라로써 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단순히 외교 관계 정도가 아니라, 명나라를 완전히 주인의 나라로 인식했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인조 반정이 명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것이니, 당시 조선인에게 명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 만 하다

명이 망한 후로는 소중화라 자부하면서 진정한 중화 사상은 조선에 있다고 믿었던 사대부들의 의식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식민지처럼 느껴지는데, 당시의 눈으로 보면 명을 같은 한자 문화권 내의 "우리"라고 보지 않았나 싶다

민족은 다르지만 같은 문자와 정신을 공유하는 한 문화권으로 인식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이민족의 지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즉각 반원 정책을 취한다

이것은 원의 간섭을 이민족의 지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명이 망할 때 조선은 끝까지 망해 가는 명을 섬기고, 그 때문에 두 차례의 전쟁까지 치룬다

명에 대한 사대는 외교 관계였을 뿐,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역사책에서 기술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명과 조선의 관계를 좀 더 근본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좋겠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실학에 대한 정의다

보통 실학이라면 주자학에 대항해 실사구시를 표명하는 혁신적인 학문이라고 소개된다

적어도 국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실학이란 수명이 다한 주자학 대신 새로운 정신을 담은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실학이 근대 정신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실학 역시 주자학을 기초로 하여 부패한 정치 관료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강을 바로 세우자는 정도일 뿐이지, 사민평등이나 자본주의 같은 근대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학을 통해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행위는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고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 가서 조선의 자랑을 얘기해 보라 하자 박지원은 조선 여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개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중국 관리가 놀래며 설마 일반 백성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냐고 했더니, 백성 전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나 사대부들은 반드시 지키고, 삼종지도의 예가 아래까지 미쳐 거의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킨다고 답한다

부분적인 예에 불과하나, 실학자의 대표적인 박지원이 여전히 열녀를 조선의 자랑으로 내세우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실학과 근대 정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명나라 후기에 일어난 양명학이나 청 중기에 생긴 고증학 등도 마찬가지다

주자학에 대항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이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나, 실상은 잘못 운용되고 있는 주자학을 바로 잡자는 운동으로, 진정한 주자학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게 본질적인 내용이라 한다

서구 사회의 근대 정신의 태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 삼국은 쇄국 정책을 유지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맹아라는 말은 좀 더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

또 굳이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는 다른 길을 걸어 왔고 사회를 움직이는 틀도 달랐는데 서구의 발전양식에 맞춰 동양 사회를 평한다는 건 좀 억지스럽다

저자들도 주장하는 바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는 좀 더 특수한 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인이 서술한 역사서지만, 객관적이고 무척 자세하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자면, 저자는 광해군 일기가 왜 두 권인지 이유를 모른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까닭은 한명기가 저술한 "광해군"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무래도 외국인 학자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한 것 같다)

어쩌면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역사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 시대의 식민 사학관도 문제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사학관도 진정한 역사 평가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 역사가 많이 번역됐음 좋겠다

안에 삽입된 풍부한 그림과 사진 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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