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김순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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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페이지 정도 되는 아주 얇은 책인데 내용이 심오하다.
너무 쉽게 쓰여져 이해하기 편했다.
신문의 북리뷰에서 보고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다.
이런 얇은 책이 만 원이라니, 만 원의 화폐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계기였다.
하여튼 책 판형도 작고, 표지도 예쁘고 읽기도 편하다.
저자가 1915년 생이라고 하니, 올해 나이가 무려 95세!
그런데도 책을 쓸 수 있는 그 체력과 열정이 놀랍다. 

정치적 평등에 대해서는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현대는 너무 바쁘고 정치에 무관심한 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니까.
심지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좋은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정치하면 어쩐지 권력 집단의 헤게모니 장악 싸움 같고 지역감정이 떠올라서 흔히 얘기하는 사회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위대한 가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 혹은 소외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가 커갈수록 정치적 평등은 멀어져만 간다.
규모가 커지니 다 모일 수가 없고, 모두에게 발언권을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시간과 규모의 제한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대표를 뽑고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사회가 팽창하면서 대표는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을 대신하게 되고, 이들의 의견을 전부 경청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지역구민과만 대화하게 된다.
또 시민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이것을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라고 한다.
먹고 살만 해야 권력에의 의지가 생기고 특히 경제 엘리트 집단의 경우 쉽게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돈이 뒷받침 되면 다음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게 순서다.
9.11 테러 같은 국가적 위기가 닥쳐도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은 제한된다.
위기 상황이 되면 행정부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고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권한을 더 많이 양도한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늘 위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정치적 불평등을 더욱 조작한다.
신기하게도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는 시장에 의해 생산과 가격이 결정되는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비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이 시장경제에 의해 소외받는 하층민들은 더욱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치적 평등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에게 대안이 있을까?
저자는 소비 문화에 한계 효용의 법칙을 대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곧 미덕이고 일정 기준선까지는 많이 소비할수록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수준을 넘어서면 아무리 소득이 늘어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소득 증가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를 우월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일종의 과시재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요트를 가졌으면 안 가진 사람에 비해 우쭐하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더 큰 요트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기가 죽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컨대 이 시기심이야 말로 끝없는 경쟁의 나락 속에 인간을 압사시키는 주범인 것이다.
저자는 소비 문화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그 때부터는 사람들이 정치적 권리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시민권이 소비 문화를 이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60년대의 반문화, 히피 문화처럼 말이다.
소비주의에서 시민권으로의 변화,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아쉽게도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논의는 여기서 끝난다. 
내가 좀 더 살아봐야 할 일이다. 

정치적 평등이 민주주의의 목표이면서도 이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도전과 노력들이 있었다.
18세기 이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는데 칸트의 순수이성론과는 다르게 저자는 롤스 식의 공리주의적 정의를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 일이 옳은 일이고 그것을 실행하므로써 내적 즐거움을 느끼는 도덕적 명령, 즉 이성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저자는 공정함에 대한 감각, 열정 때문에 정치적 평등을 추구한다고 했다.
사실 이 말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원숭이의 예에서도 보듯, 인간 역시 공정함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다른 동물들 보다 훨씬 민감하다.
어떤 계층이 특권을 가졌다면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각 말이다.
보통 상위계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나 철학의 힘을 빌린다.
이를테면 왕권신수설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층민은 이 부당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회의 변화가 무르익어 역전시킬 기회가 오면 뭉치고 일어난다.
이 혁명에의 위협이 상위층으로 하여금 특권의 일부를 내놓도록 만든다고 했다.
제임스 밀은 폭력을 수반한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만 위협으로 그치면서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에서 특권을 양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
공정함에 대한 타고난 감각과, 혁명, 즉 현재의 질서와 안정이 깨진다는 두려움이 상위 계층으로부터 권력을 쟁취하는 힘이었다고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은 열정에 기초한 것이므로 임시적이고 매우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영구하게 존속시킬 수 있도록 법과 제도로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열정이 사라진 후에도 하층민은 권리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좋은 고찰의 시간이었고 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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