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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의 일생 ㅣ 규장각 교양총서 3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10년 8월
평점 :
처음으로 의왕 도서관에 신간을 신청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빨리 읽게 됐다.
거의 2주만에 받아본 것 같다.
제목과 주제는 무척 흥미로운데 내용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조선 시대 여성이 갖는 사회적 담론보다는, 사료 조사와 분석을 통해 덜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하게 되길 기대했었는데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서술됐다.
주제의 특이성 때문인가?
일종의 인문학적 담론 느낌이 강하다.
남성 지배 계층에게 가려져 왔던 조선 여성들을 재조명 하는 것은 분명 의의있는 일이나, 지나친 의미 부여로 인해 어쩐지 현대의 인식으로 당대의 여성들이 왜곡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책이라 그 점을 경계하는 관점도 분명히 있었다.
조선 시대 여인들이 단지 겉으로만 유교적 질서에 순응하고 내적으로는 그것에 반발하고 저항했다기 보다는, 실제로 유교적 여인상을 내면화 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너무 당연한 말인 것이, 어느 시대를 살든 당대의 지배 관념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여성들의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 입각해 마치 그녀들을 시대에 저항한 투사처럼 이미지화 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나온 예를 들자면, 16세기에는 신사임당이 화가로서 평가받았으나 18세기에 들어 유교가 교조화 되면서 노론 학맥의 뿌리인 율곡 이이를 추앙하는 분위기 때문에 어머니인 신사임당도 자식을 잘 키운 유교적 여성상으로 재평가된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18세기는 유교의 교조화가 심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여성은 더욱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함몰시키는 것이 미덕으로 자리잡았고, 신사임당 역시 본인의 재능인 그림 보다는 현모양처로서의 가치가 강조된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비판하지만, 좀 더 폭넓게 보자면 저자들의 조선 여성 평가도 현대의 여성주의 시각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재조명이나 다시 보기는 조심스러운 것이다.
책을 읽은 후의 수확이라면 덜 알려진 조선 시대 여성들을 많이 접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문열의 소설로 유명해진 안동 장씨의 음식디미방은 얼마 전 TV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자세히 알게 됐다.
비슷하게 음식 조리서를 쓴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도 새롭게 알게 됐는데, 그의 시아버지가 해동농서를 지은 서호수이고 시동생이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라고 한다.
시댁이 실학자 집안이었으니 며느리의 학문적 재능도 꽃피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성리학자로 추앙받은 윤지당 윤씨나 정일당 강씨, 삼의당 김씨 등을 알게 됐고, 관북유랍일기를 남긴 의유당 남씨가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의 이모 된다는 사실도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또 스무 살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가 그의 누이 명온공주와 한글시를 주고 받았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처럼 덜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재밌는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들 역시 교육이 중시되고 민간층에까지 한시 문화가 퍼지게 됐는데 여전히 여성은 남성만큼 많이 배우면 안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가 있어 한글음만 따서 한시를 향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시를 한문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독음을 따라 읽고 뒤에 한글 번역을 덧붙이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한문이 상당히 부정확하게 기록됐다고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기 어려운 민간층에서도 한시를 향유하는 방법이었다.
명온공주가 오빠인 효명세자에게 보낸 한시도 한자 대신 이러한 한글 독음이 실려 있다.
요컨대 한글은 규방문화의 글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여 여성은 한문이 아닌 한글을 익혀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자를 이용한 놀이 문화가 발달하여 마치 퍼즐판처럼 거기에 쓰여진 한자를 가지고 시를 짓는 놀이가 유행했고 자상한 효명세자는 누이를 위해 직접 한글로 번역하여 귀문도라는 이런 글자판을 선물하기도 했다.
내 한자 실력으로는 즐길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신사임당의 그림이라든가, 여성 교육서들에 수록된 판화, 여성들의 문집, 편지글 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편집이 무척 잘 된 책이다.
일부 당위적 주장들에 대해서는 거부감도 있었으나 비교적 재밌게 읽었고 역사가 단지 정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생활상이나 문화적인 부분까지 넓게 확대되어 가는 것 같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