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 - 목소리의 그림은 문자가 당신에게 말을 걸다
스티븐 로져 피셔 지음, 박수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좀 지루하기도 하고 어려웠다.
주제는 무척 흥미로운데 구체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음운론 같은 어려운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자 서문에 나온 것처럼 가벼운 예습거리로 읽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읽다가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모르는 단어나 개념이 나오면 검색하면서 재독했더니 조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쭉 읽었어야 하는데 조금씩 끊어 읽다 보니 아무래도 연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렵고 지루한 책은, 내 배경지식이 적기 때문에 개념이 익숙치 않아 흥미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책의 경우, 비슷한 주제의 좀 더 쉬운 책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읽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 한 권에 담겨진 지식은 참으로 광범위 하고 넓은 것 같다.
단 한 번의 가벼운 일독으로 책에 담긴 전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정확한 이해 보다는 대략적인 느낌의 스케치를 하는 듯 하다.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것도 아니니 그나마 약간의 개요라도 그릴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는 심정으로 읽곤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개념은 모든 문자는 창조가 아니라 차용과 변형이라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소리를 시각적인 기호로 표기한다는 문자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됐고 지구상의 모든 문자는 바로 이 수메르 문자의 차용과 변형이라고 여긴다.
흔히 독립적인 창조로 알려져 온 한자나 중앙 아메리카의 문자마저도 기본 아이디어는 기존의 문자 사회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중앙 아메리카의 경우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한자와의 여러 유사성을 고려할 때 한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의 원리가 건너 왔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상나라 때의 갑골문은 이미 완벽한 문자의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기억 부호에서 음성을 기록하는 완전한 문자로의 진행 과정이 없는 이상, 고립된 지역의 전혀 새로운 창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 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한글 역시 불교 경전을 통해 인도의 문자체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한 것으로 본다.
언젠가 TV에서 일본의 신대문자나 인도의 어떤 글자 체계와 한글이 매우 닮은 꼴이라 세종대왕이 그런 문자들을 참조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보고 베꼈다 이런 식의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여러 문자 체계에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와 한글을 창제했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고대 중국의 한자와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자 등도 다른 곳에서 건너 온 것으로 보는 이상, 한글 역시 인류의 전혀 새로운 창조물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 전에는 한글이라는 발명품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 한국인이야 말로 엄청난 창의력을 가진 민족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사회에서 조장하기도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기호로 표기하기 적합한 문자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 왔고, 한글 같은 자민족의 문자 대신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것이, 문자를 발명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알파벳의 변용과 차용을 통해 충분히 자국어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간단히 말해 라틴 알파벳의 확산은 다양한 언어를 표기하기에 적당할 만큼 알파벳의 유연성과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알파벳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심지어 오랜 문자 전통을 지닌 중국마저도 병음표기법을 통해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다.
영어의 확산이 단순히 영미 국가들의 국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적어도 알파벳의 확산은, 멀리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된 표음문자의 아이디어를 통해 이집트의 표어문자가 원형을 확립했고 시나이 원문자와 페니키가 알파벳 등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지면서 가다듬게 된 놀라운 가소성과 안정성 덕분임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니 단순히 알파벳을 서양 문화의 확산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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