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정치 -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 전환 나루를 묻다 4
김영수 지음 / 이학사 / 200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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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열심히 읽고 있는 책.
너무 두꺼워 처음 접했을 때는 살짝 긴장하기도 했는데 스토리가 있는 소설처럼 공민왕 시대로부터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다.
마치 임용한씨 책을 보는 것 같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압축성이 부족하다는 게 흠일까?
조금만 더 핵심적인 부분으로 압축하면 밀도있고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저자의 욕심이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다. 

공민왕이라면 드라마 신돈에서 처음 주목했던 인물이다.
그 전에는 노국공주와의 애절한 로맨스, 환관에게 살해당한 불행한 왕, 이 정도가 전부였는데 정보석이 분한 공민왕을 보면서 그가 연경에 있을 당시 상황과 즉위 과정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좀 더 많은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환관에게 살해당했다는 점, 고려의 마지막 시대 왕이라는 점 등으로 어쩐지 나약하고 예술에나 빠져 있었을 것 같은 (금나라에 끌려간 송의 휘종처럼) 이미지였는데 영화 <쌍화점>에서 보여준 것처럼 상당히 냉정하고 잔혹한 부분도 많았던 전형적인 의미의 절대자다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연경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만큼 또 무너져 가는 원에 대항하여 고려의 관제를 개편하고 기철 일파를 살해하여 정권을 장악했으며 국토를 수복했던 만큼, 상당히 힘있는 왕이었을 것이다.
신하들에 의해 옹립되어 평생 제대로 권력을 펼쳐보지 못한 철종이나 헌종 같은 나약한 이미지의 군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연경에서부터 왕을 수행해 온 공신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어 가는 과정이 자못 극적이다.
책에서 마키아벨리를 자주 인용하는데 과연 공민왕은 단지 도덕적이고 착하기만 한 좋은 왕은 아니었다.
적절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신하에게 잔혹한 일면도 보여주고 배신도 서슴치 않는 매우 현실적인 왕이었다.
저자의 한탄처럼 그는 불운한 왕이었고, 고려라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울 만큼 역량이 출중하지는 못했다.
난세의 영웅이 되기에는 능력의 한계가 뚜렷했던 것이다. 

뻔한 말, 당위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던 유교 경전들이 실제 정치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점이 역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뭐 그렇고 그런 뻔한 얘기들이라 생각했는데 유교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던 시대인 만큼 당연해 보이는 구절들이 현실에 적용되니 하나의 정치 사상이 된다.
제일 흥미로웠던 대목은 풍수도참 사상과 성리학의 대립이다.
지기가 쇠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게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냐, 이런 식으로 우습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당대인들에게는 꽤나 중요한 사상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명분으로 내세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사회를 이해하는 기본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땅은 그냥 땅일 뿐이지 무슨 땅에 기운이 있어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논하나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기 전이니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을 나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틀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수맥이 어쩌네 저쩌네 하고 있고 여전히 종교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으니 전근대 사회에서 풍수 도참이 얼마나 큰 인식의 틀이었는지 짐자깅 간다.
성리학은 이러한 풍수도참 사상에 도전장을 내고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지 말고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가르쳤다.
정도에 맞게 살면 하늘이 알아서 복을 준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진일보한 사상이라 하겠다.
조선을 세운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도입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패도를 중시한 <정관정요> 대신 성리학의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 <대학연의>가 제왕학의 교과서로 바뀌었다는 부분은 꽤 의의가 있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임금도 절대자가 아닌, 교양을 갖춘 사대부의 일인이기 때문에 여론을 존중해 신하들과 상의해 가면서 국정을 논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걸음 나아간 것이 아닌가?
저자는 묘청의 서경 천도에 대한 김부식의 반론을 이러한 성리학적 자세의 일원으로 본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자주권 훼손 같은 오늘날의 원초적인 논쟁과는 별개로 당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풍수도참설 보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한 성리학적 관점에서 기술한 발전된 정치사상의 표현이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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