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 몽골 제국과 고려 1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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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년 200권의 책을 읽자고 거창한 결심을 하고 시작했건만, 연초부터 대학원 영어 시험의 압박감에 발목이 잡혀 영어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부담감만 엄청나게 느끼고 있다.
당근, 책은 한 자락도 못 읽고 있다.
일도 안 하면서 책도 못 읽고 있는 이 짜증스러운 상태!
마음이 울적할 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기분이 좋을 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 마음이 우울하면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TV만 줄창 보게 된다.
이게 능동적 독서와 수동적 시청의 극명한 대비란 말인가.  

하여튼, 이번 주에는 책을 하나도 못 읽고 밀린 감상문이나 쓰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저술가 임용한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팬이 되야 할 것 같다.
이승한씨.
고려무인이야기에서 약간 감을 잡긴 했지만 무려 4권 씩이나 되는 바람에 대충 훑어 보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다시 정독을 해야 할 것 같다.
글을 비교적 잘 쓰실 뿐더러 사서에 숨겨져 있는 행간의 의미까지 꼼꼼하게 잘 분석하신다.
논리의 비약도 적고 역사학도답게 근거가 분명하며 무리한 의견 개진도 하지 않는다.
마치 소설을 쓰듯 하나의 사건에 대해 기승전결 식으로 서술해 나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이런 책이 좀 많이 팔려야 하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있는지도 몰랐고 리뷰도 하나 없다.
왜 대중들은 이덕일류의 자극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을까?
출판사의 홍보 부족인가?
역사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론 근거와 상식적인 선의 논리 전개이지만, 책의 가장 기본 조건은 바로 문장력인데 이 책은 두 가지 조건을 잘 만족시킨다.
특히 주제를 충렬왕 시대의 몽골 원정이라고 좁게 잡았기 때문에 더욱 분석적인 글쓰기가 가능했다.
시리즈로 계속 나올 생각인 것 같은데 앞으로 쭉 읽어야겠다. 

사실 고려 시대는 조선에 비해 덜 알려졌고 게다가 원 간섭기는 부마국이라는 다소 부끄러운 지위 때문에 더더욱 외면당하고 있는데 얼마 전 손창민이 주연한 신돈이라는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조명됐다.
나도 그 드라마 보면서 처음으로 忠자 돌림의 왕들을 비로소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처음으로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는 충렬왕이다.
아버지 원종도 충경왕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재밌는 것은,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이라는 책과 이 책의 시각차다.
최씨 정권이 망한 뒤 고려 왕실은 환도를 결심하고 몽골에 가서 항복을 하려고 한다.
당시 원종은 60이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대신 세자 충렬왕이 중국으로 떠난다.
원은 아직 남송을 정복하기 전으로 3대 헌종 뭉케가 친정을 나가는 바람에 충렬왕 일행은 북경에서 황제를 만나지 못한다.
이들은 황제가 사천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떠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먼 이역땅에 좋은 일도 아니고 항복하려고 몇 달을 걸려 왔건만 황제가 사망했으니 누구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이 때 원에서는 황제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과연 충렬왕은 누구에게로 갔을까?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에서는 충렬왕이 상황 판단을 잘해 쿠빌라이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그 덕분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위상이 높아지고 독자적인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충렬왕으로써는 당시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고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고려를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시킨 것은 칸국의 독립을 인정한 자신이 정치 철학 때문이지 결코 고려에 대한 일방적인 호의 때문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내가 생각해도 후자 쪽이 좀 더 자연스럽다.
마치 한상기씨 책에서 후금이 인조반정 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온 까닭이 조선 정부의 외교 정책 변화 때문이 아니라, 명을 복속시킨 이상 더이상 청으로써는 조선과 화친을 맺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다.
즉, 형제국에서 주종관계로 청의 외교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외교 정책은 인조반정 전후로 전혀 바뀐 것이 없고 광해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 할지라도 청은 군신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쿠빌라이를 전투가라기 보다는 외교정책가로 본다.
쿠빌라이의 가장 큰 업적은 남송 정복인데 형 몽케 시절에도 시원찮아 직접 황제가 친정에 나섰고 황제의 위에 오른 후에도 남송 정벌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아릭 부케가 칸국을 억압했던 반면 쿠빌라이는 독립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갔기 때문에 각 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쿠빌라이는 끝없는 영토확장을 꾀하는 유목민에서 벗어나 중원에 정주하는 정착민이 됐고 원을 건설했다.
고려 역시 직접 지배보다는 간접 지배를 택했다.
60년 대몽 항쟁 덕분에 자주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에 대해 저자는 반대하는데 다른 책을 참조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부마국이 된 후 팍스 몽골리나 하는 표현에 대해서도 저자는 부정적이다.
원의 부마국이 된 후 고려가 감수해야 할 피해가 너무나 엄청났고 내정간섭이 심해 독립국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평화가 오긴 왔는데 고려 왕실이 무인 정권 이후 독자적인 위상보다는 원 황실의 비호 아래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100년도 못 돼서 조선이 세워질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읽게 된다.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은 원 제국의 존속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만약 성공했다면 원은 보다 장기적인 제국 유지가 가능했을 것이고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고 그 후에도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고려에 엄청난 짐을 지우게 된다.
일본 원정이 남송 정복처럼 반드시 해야 할 필생의 업은 아니었던 탓에 내부의 반대도 많았고 쿠빌라이 역시 항복한 남송 군대와 고려인 위주로 원정군을 편성했기 때문에 태풍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승패 여부는 불확실 했다고 본다.
요컨대 1차는 규모가 너무 작았고 2차는 무리하게 인원을 모으다 보니 군량미 조달 등의 문제로 8월 태풍철에 출전하게 되서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하늘의 도움으로 국난을 극복한 것이니 막부 정권의 위상은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고 2차 대전 당시의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이어지는 일본 정신의 상징이 된다.
아무래도 바다 건너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이득을 많이 본 경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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