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전을 찾아서 - 한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 이상의 도서관 1
임형택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보관함에 담아뒀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됐다.
마이리스트에 보고 싶은 책을 정리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알라딘 서재에 늘 고맙다.
잊고 있다가도 어느날 문득 리스트를 들여다 보면 좋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반갑다.
이 책 역시 한참만에 읽게 된 책인데 안 읽고 지나쳤으면 정말 서운했을 뻔 하다.
700 페이지가 넘는 상당히 두꺼운 책이라 한번에 쭉 읽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한자 부분은 넘어가면서 발췌독을 했더니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은 정독을 어느 정도는 포기했다.
옛날에는 서문 한 글자라도 빼먹으면 책을 읽지 않은 기분이 들어 정말 책날개 광고까지 꼼꼼하게 다 읽었지만, 지금은 삶이 워낙 바쁘다 보니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대한다.
여러 방면에 호기심이 많고 다양한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부족한 시간과 맞물려 이제는 발췌독을 해도 마음이 편하고 그 책이 주는 지적 만족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쉽긴 하다.
100% 인 책의 매력을 70% 정도만 느낀다고 할까?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삶의 많은 부분들을 포기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한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문과를 가서 공무원 시험을 봤더라면 훨씬 적성에 맞았을텐데 고등학교 때는 한자가 그렇게 싫었다.
그래서 복잡한 법전이나 행정법 읽는 시험 공부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자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부터일 것이다.
한자로 표기를 하면 뜻이 정확해지고 그 어원을 알 수 있어서 단어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다.
한자가 주는 조형미도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 서예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최소한 생활한자라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자고 옥편을 열심히 찾긴 하지만 사실 일상생활에서 크게 쓸 일이 없어서인지 잘 늘지가 않는다.
그래도 책을 보면서 익히게 되는 소득이 크다.
특히 이런 고전을 볼 때 도움을 많이 받는다.
한문에 좀 밝다면 한시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한글로 풀어써 놓은 걸로는 그 시가 주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기 어려운 듯 하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서구화로 생활이 바뀌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기억 속으로 사그러졌고 특히 한문학은 더더욱 찬밥 신세가 된 듯 해 안타깝다.
저자 역시 우리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문학이 골동품 등에 비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함을 애닯아 하면서 옛 고전을 발굴해 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렇게도 많은 책들이 전해져 내려왔나 싶을 만큼 정말 다양한 고전들이 많았다.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이 대부분이라 생소하고 낯선 인물들과 제목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조선왕조는 의궤와 실록으로 대표될 만큼 기록문화에 한 획을 그은 시대였는데 그 안에서 수많은 저작들이 꽃피웠음은 너무 당연하다.
한문학이 더이상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지나간 것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문학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고전들은 보다 활발하게 연구가 되어야 하고, 또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으면서 늘 부정적으로만 인식되었던 사대부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됐다.
비록 사변적이고 교조적으로 변해 결국 새 시대의 사상으로 변모하는데는 실패했지만, 그저 당파싸움이나 일삼는 명분론자들로 치부하기에는 사대부들의 교양과 학식, 마음가짐, 도덕성 등이 너무나 크고 적어도 전통사회에서는 국난을 극복하고 왕조를 유지할 만큼 역량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탄력적 대응이 매우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면 관리가 곧 학자였고, 독서와 자기수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던 시대이니 어찌보면 상당히 이상화 된 사회가 아니었을까?
비록 그것이 실제 생활이 생산력이나 사민평등 의식 등과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이론적으로는 매우 이상적으로 보인다. 

다산 정약용만 문집을 많이 남긴 줄 알았는데 글깨나 한다는 학자들은 개인 문집을 꽤 많이 발간했던 것 같다.
후손들이 글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책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후기로 갈수록 영남 남인들이 정권에서 배제되면서 과거의 꿈을 접고 학문에 진력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율곡이 구도장원을 했다고 해서 과거 합격하기가 쉬운 줄 알았더니 정말 이런 바늘 구멍이 없다.
일단 3년에 한 번 열린다는 것도 그렇고 (물론 이런저런 명목으로 많은 과거가 치뤄졌지만) 양반 사대부는 모두다 과거를 준비하는데 합격자는 단 서른 세 명이었으니 거기다가 후대로 올수록 서울의 권문세가 자제들만 합격하는 실정이었으니 얼마나 좁은 문이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임금이 내린 어사화를 꽂고 거리를 삼일 동안 유가한다는 전통이 왜 생겼는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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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9-12-22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적성에 안 맞게 그 쪽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ㅇ님도 공대?? 역시 너무 뜻밖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