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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ㅣ Mr. Know 세계문학 48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책.
일본 소설은 왠지 조잡스러운 느낌이 들어 (이를테면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잘 안 읽게 되는데 일단 표지가 예쁘고, 일본의 대표적 작가라고 하고, 리뷰가 좋아서 빌리게 됐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간만에 정말 몰두해서 빠져들고 있다.
사실 분량이 꽤 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말대로 쉬운 문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정말 괜찮은 소설이다.
마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을 보는 것 같다.
그 책은 19세기 영국 상류층 관습에 너무 무지해 공감이 영 안 됐는데 오히려 <세설>은 가까운 일본의 풍속을 그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간혹 반도의 부인들 이야기가 나와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생각나 소설 내용과는 상관없이 콧망울이 시큰해질 때도 있긴 했다.
괜한 비교가 되곤 했다.
20세기 초의 일본은 이렇게 잘 사는데, 이렇게 여유있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온갖 문화적 기술적 혜택을 누리고 사는데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식민 치하의 통치에 시달리며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가.
소설에서 딱히 식민지 현실을 언급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등장하는 반도인들 이야기가, 부유한 상류층인 주인공들의 삶과 비교되어 괜시리 마음이 아팠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늘 생각하는데도 이런 부분에서 울컥 한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 반발심 이런 건 없는데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뒤쳐져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우리 조상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이광수 등이 쓴 신소설을 읽어보면 20세기 초의 우리 옛 모습이 이렇게 잘 그려졌을까?
워낙 소설을 안 읽는 편이라 우리 근대 소설도 거의 못 봤는데 문득 <무정>이나 <유정> 같은 소설들이 보고 싶어진다.
풍속소설이 이렇게도 재밌는지 처음 알았다.
얼마 전에 읽은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정말 힘들게 의무감으로 읽었는데, 이 소설은 일반 대중에게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품격은 매우 고상하다.
쉬운 문체로도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같은 소설도 꼭 읽어 봐야겠다.
쓰루코와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 네 자매의 이야기가 밑의 두 자매의 혼담과 맞물려 펼쳐진다.
특이한 것은 양자 제도였다.
딸만 넷인 아버지는 큰 사위와 작은 사위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어간다.
양자라고 하면 성을 바꾸는 것일텐데 사위들이 그것도 두 명이나 양자로 간다는 게 신선한 풍속이었다.
몰락한 상류층으로 나오긴 하지만 가문의 전통이나 품격은 가지고 있는 이 집안의 네 자매들의 생활방식이 참 흥미진진하다.
마치 사라져 버린 우리 양반 가문을 보는 느낌이랄까?
집에 애 보는 식모와 밥 하는 하인들이 따로 있는 것도 신기하고 신분제가 폐쇄됐는데도 여전히 도련님, 아가씨 하는 계급 시대의 유산도 보인다.
가부키가 굉장히 중요한 문화 행사로 나온다.
막내 다에코가 가장 다이나믹한 여성인데, 인형 제작에 흥미가 있고 전통춤도 잘 추며, 양재일로 직업까지 가지려고 한다.
직업부인이 되는 것은 가난한 여자들이나 하는 천박한 일로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시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다에코는 놀랍게도 신분이 다른 사진사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
원래 그녀는 비슷한 신분의 오쿠바타케와 도망을 쳐서 지역신문에 날 정도였는데, 오쿠바타케네 집 하인이었던 이타쿠라를 좋아하게 된다.
물난리가 났을 때 사진사였던 이타쿠라가 그녀를 구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게이샤와의 사이에서 애까지 낳은 난봉꾼에다가 멋만 부릴 줄 알지 생활 능력은 없는 오쿠바타게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미국까지 가서 사진 기술을 배워 온 믿음직한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결심하는 모습에서 다에코의 현대성을 느낀다.
언니 유키고는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가문에 걸맞는 남자를 찾기 위해 아직도 선을 보러 다니는데 동생 다에코는 직접 인형 제작으로 전시회도 열고 돈도 벌고 심지어 프랑스까지 양재 기술을 배우러 갈 계획도 세울 만큼 대찬 구석이 있다.
두 자매의 가치관과 행동들이 비교되어 무척 흥미롭다.
뜻밖에도 신분의 차를 넘어 결혼을 결심한 다에코 때문에 집안은 난리가 나는데서 1권이 끝난다.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어 내릴 곳을 잊곤 한다.
잠깐 본 하권의 첫 장에서 이타쿠라가 유양돌기염 수술을 하다가 정신을 잃는 것으로 나와 급하게 다에코가 도쿄를 떠나는 걸로 되어 있던데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유키코는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까?
유산했던 사치코는 다시 애를 가질 수 있을까?
일일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더 인상깊었던 것은 오사카의 지방 문화였다.
여기 나온 간사이 지방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수도 도쿄와는 전혀 다른 지역색이 강한 곳 같다.
모든 게 수도 중심인 나라에 살다 보니, 지방색 강한 이런 문화는 낯설고 신선해 보인다.
자매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간사이 지방을 굉장히 사랑하고 저자 역시 애정어린 눈으로 간사이 문화를 기술한다.
남자면서도 어쩜 이렇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하게 풀어 쓰는지.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보다는 훨씬 더 재밌게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