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의 그림과 생애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승규 옮김 / 한명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화가, 루벤스.
뒤러처럼 정교하고 세밀한 화풍도 좋지만, 루벤스처럼 격정적이고 화려한 색감도 정말 좋아한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렘브란트의 명상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바로크의 대가.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읽게 됐다.
계획에 없던 책들은 한 번 지나치면 그만이기 때문에 벌써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이 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당장 빌리게 됐다.
그러고 보니 역자의 서문대로 루벤스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은 못 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번역이 실망스럽다.
앞에 역자 서문은 거창하게 써놓고서 어쩌면 이렇게 성의없는 번역을 했는지...
맞춤법이 틀린 건 기본이고 고유명사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직역했다는 느낌을 받아 독자에게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mannerist 를 만네리스트, 이런 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럴 거면 원어를 써 주던가.
그리고 수많은 그림 제목들이 등장하는데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같은 책에서 다른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
적어도 도판에 실린 그림들이라도 영어 제목을 써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에 실리지 않은 그림들이 워낙 많아서 구글에서 좀 찾아볼까 했는데 중구난방식의 한글 제목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화가이고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사실 이 책의 성격도 독자에게 썩 친절하지는 않다.
본격적인 학술서라기 보다는 서문에 밝힌대로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담론 수준이기 때문에 화가의 그림에 대한 저자의 감상들을 특별한 차례없이 편하게 언급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저자 역시 생전에 출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 저자는 본격적인 미술사학자라기 보다는 르네상스 시대 전문가였다고 한다.
제일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 제목들이 등장하는데 (루벤스의 중요한 그림들은 거의 다 나오는 것 같다) 도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떤 그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데 그 그림이 뭔지를 모르니 구도나 명암 처리 등을 순전히 말로 상상해야 한다.
요즘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서 제대로 된 원어 제목만 첨가를 해 줬더라도 검색해서 보면 됐을텐데 역자의 성의가 참 아쉽다.
품절이 된 것 같은데 다른 출판사에서 꼼꼼한 역자가 도판 추가를 좀 더 많이 해서 재출간 하면 어떨까 싶다.
어차피 루벤스에 대한 연구서가 많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 스타일과 시대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 수직 구도나 이등변 삼각형 구도 같은 건 지금까지 미술 서적들을 읽으면서 한번도 꼼꼼하게 본 적이 없었는데 저자의 세밀한 설명을 들으면서 비로소 구도에 눈을 뜬 느낌이 든다.
루벤스가 추구하고자 했던 대칭 구도, 명암대비, 빛 처리 등을 보면 정말 서술화의 대가구나 싶다.
표지에도 나오며는 그림이지만 <레우키포스 딸의 납치> 를 보면 제우스의 두 아들들에게 납치당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역동적으로 잘 잡아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두 여인은 서로 다른 부위를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른 책에서도 많이 소개된 루벤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역시 많이 알려진 첫번째 아내와의 초상화가 있는데 뜻밖에도 이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이 아니라 동료인 코르넬리스 데 보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검색을 해 보니 루벤스 작품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도판이 더 밝은 톤으로 실려 훨씬 매혹적이다.
젊은 시절의 잘 나가던 최고의 예술가와, 그의 아름다운 첫번째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의 호화로운 옷장식이 인상적이다.
만년의 자화상도 무척 인상깊다. 

 

대가다운 아우라가 느껴지고 자화상이라 그런지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어딘지 모르게 엄숙하고 자신의 예술혼을 경건하게 표현한 느낌이 든다.
오른손의 장갑은 통풍이 있어 가리기 위해 낀 것이라고 한다.
말년에 이 통풍이 심장으로까지 퍼져 사망했다고 하는데 의학적인 설명은 아닌 것 같아 나중에 찾아 볼 생각이다. 
그의 축복받은 생을 서술할 때 빠질 수 없는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의 초상화도 매혹적이다. 

 

50대의 나이에 17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결혼한 이 복많은 화가는, 첫 아내의 유언 때문에 헨드리케와 정식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동거 상태로 지내야 했던 불운한 렘브란트와는 달리, 영국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작위도 받고 외교관으로 종횡무진 하면서 재산도 지키고 어린 아내와의 사이엑 아들딸도 낳아 행복한 말년을 보낸다.
렘브란트의 불운한 말년과 비교하는 건 어쩐지 점잖지 못한 호사가들의 행동같아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 화가의 극명한 화풍의 차이는 삶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무엇보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루벤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원숙미가 더해져 창작력의 후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티치아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70대의 노년에 그린 자화상과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같은 후기작들을 보면서 역시 대가답다,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원숙해지는구나 감탄했었는데 루벤스 역시 그렇다.
잘 알려진 마리 드 메디치의 연작은 워낙 구성이 다이나믹하고 화려해서 약간은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덕분에 이 유명한 여인은 미술사에서도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듯 하다. 

 

루벤스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육체가 풍만하고 살결이 곱고 금발 머리다.
역동적인 제스쳐에 걸맞는 풍만한 몸매를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 데이빗 호크니가 쓴 <명화의 비밀>을 보면 앵그르 등은 도구를 이용해 정교한 드로잉을 했던 반면 루벤스는 도구의 도움없이 순전히 자신의 눈에 의존해 인물을 묘사했다고 한다.
그 책을 보고 나서 더욱 루벤스를 좋아하게 됐었던 기억이 난다. 

이 놀라운 앤트로프의 화가는 정말 많은 작품들을 남겼고 63세에 사망하긴 했지만 당시로 보면 아주 이른 죽음은 아니었으며 외교관 등으로 여러 왕실 사람들과 교제하는 유명인사였고 가정사적으로도 행복했으니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역동적이고 삶의 의지가 넘치는 힘있는 분위기는 축복받은 삶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과장되고 격정적인 양식인 바로크 시대와 작가의 스타일이 맞아 떨어져 최고의 에너지를 발산한 게 아니었을까.
이 책은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던지라 100%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루벤스의 작품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찬찬히 하나의 작품을 설명해 주는 책들을 좀 더 읽어 본 다음에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어쨌든 바로크의 위대한 화가의 작품 세계를 밀도있게 보여 준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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