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현대미술의 기원
김영나 지음 / 시공사 / 1996년 1월
평점 :
절판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됐을까?
1990년대에 나온 책이니 벌써 10년도 더 된 옛날 책인데 말이다.
알라딘에서 표지만 보다가 막상 도서관에 가서 실제 책을 대하니, 너무 오래된 책 같아 고를까 말까 한참 망설였었다.
그렇지만 꾸미지 않고 직설적으로 책의 내용을 압축하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에 믿음이 생겨 빌리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아직까지 절판되지 않아 너무 기쁘고 편집을 새로 해서 재출간 돼도 좋을 것 같다.
저자가 여성분이시고 이름도 독특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미술사학가도 참 멋진 직업 같다.
오래된 책이고 쫙 벌어지게끔 책이 엮여있어 안타깝게도 서론 몇 장이 분실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어떤 분이 참 열심히도 보셨는지 밑줄을 어찌나 많이 그어 놨던지 욕 나와서 혼났다.
심지어 드로잉까지 그려놨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일 책 같으면 자기 돈 내고 사서 볼 일이지... 

표지가 된 그림은 입체파로 알려진 브라크의 야수파 시절 작품인 <집 뒤의 나무들>이다.
브라크가 처음에는 마티스 등과 같은 유파에 속해 저런 그림을 그렸다니, 처음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을 100% 다 소화하지는 못했다.
내용이 특별히 어렵거나 난해하지는 않다.
오히려 일반인이 읽기 쉽도록 편안한 문체로 쓰여 있으면서도 상당히 깊이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좋은 문장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워낙 미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설명 부분에서는 아, 그렇구나 이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에서 끝났지 이걸 내 문장으로 요약하기는 아직 무리인 것 같다.
그저 쓱 하고 지나가는 인상비평 정도가 내 수준인 것 같다.
그렇지만 희망을 갖고 있는 점은,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여러 책으로 읽다 보면 어느 정도 윤곽선이 잡히면서 내 나름의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장 이 책의 주제인 현대 미술만 해도 그렇다.
막 그림에 눈을 떴을 때는 르네상스나 바로크, 신고전주의 같은 놀라울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완벽한 재현작들이 좋았다.
현대미술은 거부감이 들었고 말장난 같았으며 현학적으로 보여져 가짜 같았다.
사변적이고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특히 다다이즘이나 팝아트는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전시장에 가 보고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들을 접하다 보니 오늘날 현대 미술이 자연의 모방에서 순수회화 언어로 어떻게 전환하게 됐는지 이해하게 됐고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지금은 정교한 고전 시대의 그림도 물론 좋지만 인상파 그림은 물론 야수파나 입체파, 표현주의, 상징주의 등등 20세기 화풍에도 열광한다.
그만큼 감상의 폭과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할까? 

도판이 너무나 생생하고 화려해서 보는 내내 감탄했다.
그동안 몰랐던 그림들이 너무 많다.
고갱은 고흐의 열정적이고 원색적인 화풍에 비해 별 매력을 못 느꼈는데 유명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의 작품을 인상적으로 보게 됐다.
원시주의라고 일컫어지는 고갱의 독특한 소재와 화풍이 인상적이다.
<설교 후의 환영> 이라는 그림도 새롭게 보인다.
고흐의 격정적인 붓질과는 다르게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함께 실린 베르나르의 <호밀 추수>라는 그림도 기억에 남는다.
이런 기법은 윤곽선을 두껍게 그린 후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를 채워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클르와조니즘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의 양식과 기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많이 배웠다.
뭔가 나에게 느낌이 오는데 그걸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라 그냥 멋있다, 인상적이다, 이렇게 밖에 안 나와 답답했는데 이런 부분들이 많이 해소됐다.
붓질을 여러번 해서 색을 분할하던 점묘법의 신인상주의와는 구별되는, 평면 색면과 강한 윤곽선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과는 또다르게 굉장히 강렬해 보인다. 

인상파가 광선에 집중하면서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키자 아카데미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그 분위기는 받아들이고자 했던 유파가 바로 모로나 르동, 샤반느 등으로 대표되는 상징주의다.
바로 나같은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던 당시 관객들에게 적당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에콜 드 보자레의 교수이기도 했던 모로는 형태를 정교하게 묘사한 아카데미즘적 기법으로 살해된 올레푸스의 머리나 살로메에게 환영으로 보이는 요한의 머리 같은 환상적인 작품들을 남긴다.
신고전주의 같은 정교한 기법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표현한다, 무척 매력적으로 들린다.
모로는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하도록 격려했고 그 제자들 중 하나가 마티스라니, 놀랍다.
마티스는 피카소와 늘 비교되지만 나는 여태껏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보면서 마티스의 매력에 새롭게 빠져들게 됐다.
특히 <모자를 쓴 여인> 이나 <초록색의 선> 같은 작품을 보면 색의 대비를 통한 입체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마티스와 더불어 야수파를 이끌었던 드렝은 사실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화가다.
그 중에서 특히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구글에서 찾아 붙인 그림인데 책에는 더 선명한 도판으로 실려 훨씬 매력적이다.
설명에 따르면 <기하학적 색면 구조와 단순화되고 각이 지는 인체의 윤곽선> 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정말 입체적이고 매혹적인 그림이다.
어쩌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화풍이 바로 이런 야수파의 그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은 매력을 느꼈다.
이런 강렬한 채색과 뚜렷한 윤곽선이 주는 뚜렷한 인상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정말 알면 알수록 회화의 세계는 깊고 넓다.
보치오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도 새롭게 발견한 수작들이다. 


<일어나는 도시>
역동적이고 강렬하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무려 3m나 되는 대작이라고 한다.
또 한 작품, <대회랑의 폭동> 

 

위의 그림은 분할주의 기법으로 그려졌고 개인의 감정 표현보다는 집단의 의지나 운동감을 표현한 미래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윗쪽으로 비치는 빛쪽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그림 속에서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격앙이 느껴진다.
단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줄 유토피아를 추구했다는 몇 마디 문장으로만 알고 있던 미래주의 화파의 작품들을 직접 대하니 역시 회화는 이론이 아닌 작품으로 말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그림, 들로네의 <에펠탑>도 빼 놓을 수가 없다. 

 

아폴리네르가 레제와 피카비아, 뒤샹, 들로네 등을 가리켜 음악과 유사하게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순수미술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오르피스트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정말 이 에펠탑 그림을 보면서 리드미컬 하고 위로 치켜 올라갈 것 같은 역동감을 느꼈다.
전통적인 원근법은 사라졌고 공간이 휘어지면서 공간과 대상의 완전한 통합을 보여 준다고 한다.
멀리서, 가까이서, 위에서, 아래에서 등등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다시점의 작품이고 그래서 리듬감이 생긴다.
파편화라는 입체주의가 추구하는 바를 대략적이나마 알 것 같다. 

이 책을 읽고나서 가장 큰 소득이라면 대체 입체주의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약간이나마 감을 잡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여태껏 나는 대체 왜 세잔이 현대미술의 시작점인지 이해를 못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생 빅투아르 산 연작이나 사과만 계속 그린 정물화가 대체 왜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일까 늘 의아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세잔이 추구했던 것, 자연의 재현을 벗어나 대상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했다는 점, 물체가 지니는 내적 속성, 양감과 깊이감을 추구했던 것, 공간을 비어있게 내버려 두지 않고 대상과 공간의 조화를 꾀하면서 공간도 대상만큼 중요하게 취급한 점, 바로 공간의 물질화, 견고한 공간을 추구했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대상이었고 그것의 완벽한 묘사였다.
그러나 사진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바뀌면서 수요층이 변하면서 더 이상 자연의 완벽한 모방은 흥미를 잃게 된다.
자연의 재현이 아닌, 색체와 구성만으로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의 추구, 내면의 표현, 감정과 욕구의 분출, 무엇보다 회화 자체의 조형미가 중요시된 현대미술의 시작, 바로 거기에 세잔이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공간에 광선이 주는 느낌을 표현했다.
그리고 세잔은 수평과 수직의 붓작업을 통해 견고한 조형적 공간을 추구했다.
이제 입체파는 다시점을 통해 파편화된 공간을 통해 대상만큼이나 공간을 중요시 했고 새로운 공간의 물질화를 이룩했다.
회화는 단순히 기법과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 사회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며 화가들의 끊임없는 도전의식과 회의를 통해 의식과 함께 성장함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끼게 됐다. 

정말 너무 재밌게 유익하게 읽은 책이고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바에 대해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좀 더 많은 책을 읽어봐야겠다.
회화가 이렇게 철학적이고 혁명적이며 사회적인지 미처 몰랐다.
정교한 기술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현한 고전시대의 화가들과 현대 화가들은 어쩐지 다른 부류의 사람들 같다.
장인과 예술가의 차이라고 할까?
누가 더 위대하다는 이런 유치한 비교가 아니라 시대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인물들 같다.
맨 마지막에 대중과 유리되어 이해받지 못하는 작품들을 만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의식과, 국제화된 미술 시장의 확대로 새로운 고소득층으로 등장한 현재 화가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새겨 들을만 하다.
아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미술인 만큼 옥석은 시간의 흐름이 가려주리라 믿는다.
하여튼 추상미술은 자율성의 최고치이고, 무엇보다 독창성과 혁신성에 있어서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의 분야가 아닐까 싶다.
얼마나 파격적이냐, 충격적이냐, 신선하냐, 독창적이냐 등으로 판단되는 현대미술은 기법과 주제의 변화무쌍함이 끝이 없어 보인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나도 그림을 배워 보면 어떨까 싶다.
정말 그림에는 전혀 재주가 없지만, 기본적인 드로잉이나 붓질하는 법을 익히면 감상하는 안목도 좀 더 깊어지고 무엇보다 내면의 충동이나 감정을 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내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현대미술은 기술의 출중함 보다 표현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 어쩐지 나도 취미삼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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