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타슈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10
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지음, 최병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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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술사에 관심이 생기면서 덩달아 미술관에도 흥미가 생겨 빌리게 되었다.
이 미술관 시리즈는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바로 내가 찾던 책이라고 흥분하면서 읽었는데 몇 권 읽다 보니 글의 유기성이 부족하고 그냥 대표작 몇 점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어 중간에 시리즈 읽기를 포기했었다.
그렇지만 최근 다시 미술관의 유명 작품이 뭘까 궁금증이 생겨 새로 읽기 시작했다.
아쉬운 점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냥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두서없이 쓰다 보니 글이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게 아니라 따로 논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에르미타슈 미술관 편도 현학적이고 그림에 대한 설명이 너무 단편적이라 아쉬운 점이 많았다.
좋은 점을 들자면 그림을 부분으로 확대한 컷이 많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역시 그림책의 생명은 도판이다.
도판이 생생하다는 장점이 다른 모든 단점들을 상쇄해 준다. 

에르미타슈 미술관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이나 파리의 루브르에 필적하는 대형 미술관일 뿐더러 소장품의 질도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의 해설 부분을 읽어 보니 대부분이 예카테리나 2세 때 기반을 잡았다.
러시아의 서구화를 주도한 표트르 대제 때는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인 플랑드르 미술품을 주로 수집했고 그의 손부인 예카테리나 2세 때 디드로 등의 백과사전파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프랑스 고전주의 그림들이 많이 추가됐으며 혁명 이후 미술관들이 통폐합 되는 과정에서 피카소나 마티스 등의 현대 회화들을 갖추게 되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판들을 살펴보면 눈이 황홀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만큼 대단한 명작들이 많다.
특히 나는 빛이 투명한 대기를 잘 표현한 피테르 드 호흐 같은 플랑드르의 도시 풍경화를 좋아해 더욱 내 마음에 꼭 든다.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를 꽃의 여신 플로라에 비교한 그림은, 이게 늘 명상적이고 어둡다고 느꼈던 렘브란트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돌아온 탕자를 맞는 눈 먼 아버지의 그림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덧붙일 찬사도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크 시대의 거장 루벤스의 작품도 훌륭하다.
안드로메다를 메두사로부터 구해 주는 페르세우스과 그의 애마 페가수스의 그림은 역동적이고 감각적이며 격정적이다.
같은 주제로 신고전주의 화파의 맹스가 그린 작품은 시대적 차이를 잘 드러낸다.
마치 다비드나 앵그르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대리석 같은 인체의 투명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이른바 도시 경관화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그렸던 카날레토의 작품도 빼놓을 수 없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했던 어떤 전시회에서 카날레토 그림을 처음 본 후 도시를 아우르는 그 거대한 풍경에 압도당한 나는 이 화가의 열렬한 팬이 됐다. 

책을 읽으면서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티에폴로가 그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교양 예술을 설명하는 발주자> 라는 작품이 나오는데 해설을 읽어 봐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가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온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교양이나 예술에 대해 조언하는 Maecenas 라는 조언자가 있었고 이 사람을 프랑스어로 발음한 게 바로 기업예술후원의 원조가 된 메세나 (Mecenat) 라고 한다.
대체 왜 발주자라고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다.
교양 예술도 다른 번역인 자유 학예가 훨씬 더 와 닿는다.
내가 찾아 본 바로는 영어 제목이 "Maecenas presenting the liberal arts to Emperor Augustus" 이다.
이게 훨씬 더 잘 이해된다.
그림에서는 회화, 건축, 조각을 대표하는 세 여인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있다.
번역자의 약력을 보니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던데 좀 더 친절하게 각주를 붙여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메세나라는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되서 기쁘다. 

또 한 사람 빼 놓을 수 없는 화가가 바로 스페인의 위대한 거장 프란시스 고야이다.
앞선 시대의 벨라스케스와 함께 거론되는 이 거장의 초상화는 정말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반 다이크나 게이즈버러처럼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들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의 초상화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여배우 안토니오 다 자라테를 그린 이 초상화는 설명에 따르면 고야의 절정기에 그려진 것으로 서른 여섯에 죽기 직전 모습이라고 한다.
어쩐지 우수에 차 있고 슬퍼 보이는 게 정말 죽음을 앞두었다는 게 실감난다.
역시나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화가, 카라바조의 <류트 연주자>도 인상적이다.
강렬한 명암 대비와 빛의 효과로 유명한 카라바조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이 화가의 작품은 에르미타슈에 딱 이것 뿐이라고 한다.
단 한 점이지만 역시 카라바조의 대표작에서 빠질 수 없다.
류트의 정교한 형상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옆에 그려진 꽃병의 꽃은 한 편의 훌륭한 정물화를 보는 것 같으며, 무엇보다 류트를 연주하는 손의 섬세함은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대체 저런 색감과 형태를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묘사해 낼 수 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화가다.
또 한 사람,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의 작품 <성 세바스티아노> 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특히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말년에 정교한 소묘 대신 뭉뚱그리는 색으로 형태를 표현해서 미완성 작품으로까지 여겨졌다고 한다.
윤곽선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 보다 두터운 양감으로 형상을 만든 이런 방식이 훨씬 매혹적이고 또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벨라스케스가 붓질 몇 번으로 멀리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인물을 표현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색의 대가구나 싶을 만큼, 선 대신 면으로 화살을 맞고 순교한 성인 세바스티아노를 훌륭하게 표현했다. 

현대로 넘어 오면 클로드 모네의 <정원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모네의 유명한 수련 연작보다 대중적으로 더 인기있고 매력적인 그림이다.
스물 여섯 젊은 시절을 보냈던 르 아브르 항구의 중심가를 그렸다고 한다.
하얀 양산을 들고 있는 흰 원피스의 여인, 그리고 그녀가 산책하고 있는 태양이 작렬하는 화려한 정원!
정말 이 그림을 보면 모네가 표현하고자 했던 대기의 인상, 외광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같이 실린 세잔이나 마티스 작품은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라 좋은지 모르겠고 대신 내가 좋아하는 피카소의 작품은 역시 내 마음을 흔든다.
청색 시대에 그린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 이나 큐비즘 시기에 그린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 은 과연 독창적이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화가구나 싶다.
사진이 발명되고 놀랄 만큼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똑같이 그린다는 것은 별 흥미가 없는 일이 되버렸다.
현대 미술은 시대적 특성상 기법과 양식의 혁신, 발랄한 상상력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느낀다.
피카소가 시대를 아우르는 위대한 천재로 추앙받는 이유도 바로 이런 혁신성에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가면에서 영감을 얻은 이 그림은 갈색과 붉은 색을 사용해 양감을 통합하였고, 신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큐비즘을 보여 준다.
마티스의 그림은 지난 번에 시립 미술관에서 열렸던 <퐁피두 미술관 전> 에서 직접 보니 굉장히 발랄하고 마음을 확 뺏는 매혹적인 색채들이 인상적이었는데 도판으로는 솔직히 그 매력을 잘 모르겠다. 

설명은 불만족스럽고 현학적이며 어쩐지 대충 썼다는 느낌마저 들지만, 대신 도판이 훌륭하고 무엇보다 에르미타슈 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워낙 훌륭해 정말 재밌게 읽었다.
어느 시절에 직접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방문하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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