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 현판 2 한국의 사찰 현판 2
신대현 지음 / 혜안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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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보다 더 재밌다. 
1편에서 기본적인 주제를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2편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가운데 1/5 정도는 못 읽어서 무척 아쉽다.
워낙 안 알려진 책이라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의 상호대출 서비스가 없었다면 못 읽었을 것이다.
경기도 내의 도서관끼리 책을 빌려 주는 시스템인데 정말 놀라운 서비스다. 

여기 소개된 절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절이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관광갈 때 놀이공원 빼면 죄다 이런 절들이다.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곳에 거기 세워진 절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또 현대에는 미국의 영향령에 따른 기독교 위세에 눌려 왠지 쇠락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4세기 무렵 고구려 땅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1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사찰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
서양 문화를 알려면 기독교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기독교인들이 대체 왜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이 되는 불교에 대해서는 이토록 적대적이고 무지한지 알 수가 없다.
몽골 침입이나 임진왜란 등의 전란이 없었다면 신라, 고려 때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의 절이나 불상들이 훨씬 더 많이 전해질텐데 참으로 아쉽다.
현대사 직전의 전통 왕조가 불교를 배척하는 바람에 고급 문화로 편입하지 못하고 민간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온 불교의 실정은 이런 현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의 한탄처럼 절의 연혁을 밝히는 현판들이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을텐데 버려지고 누가 관심도 갖지 않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요즘 일상사 연구가 유행을 타면서 각 문중에 보관하던 고문서들이 빛을 발하는 만큼 절의 현판에도 관심을 가져 활발하게 연구가 이뤄지면 좋겠다. 

현판의 어려운 한문을 능숙하게 해석하는 저자의 실력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글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간간히 불교의 쇠락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글솜씨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을 보여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내가 한문을 좀 알면 더 재밌게 읽었을텐데 워낙 지식이 전무해 해석한 것만 읽었다.
나중에 절에 가면 이제 현판도 눈여겨 보고 절의 연원을 설명하는 해설문도 꼼꼼히 읽어볼 것이다.
올 초에 놀러갔던 부여의 부소산에 있던 고란사는 고란초가 많이 나서 절 이름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휙 보고 지나갔는데 백제 때부터 있던 절이라니, 좀 유심히 볼 걸 아쉽다.
남해군에 있는 용문사는 원래 원효대사가 보광사를 지었는데 조선시대 유생들이 남해 향교와 마주보는 자리에 있다고 옮기라고 시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절을 옮긴 후 다시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 시대 때부터 있어 왔던 천 년 역사의 절을 이제 갓 지어진 향교하고 마주 본다는 이유로 옮기라니, 당시 스님들이 느꼈을 분노와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조선 시대 불교가 왕실의 비호를 받고 유생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종교로써 의의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명맥을 이어가긴 했으나 이런 비화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여주에 있는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묘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여강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고 오늘날에는 절을 한 바퀴 도는 여강 보트 투어도 하고 있다니 한 번 가 보고 싶다.
예종이 재위 1년만에 죽고 장지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바로 옆으로 결정되자 어머니 정희왕후가 세조의 뜻을 받들어 시아버지의 묘를 여주로 옮겨 크게 단장하고 그 원찰로 신륵사를 지정했다고 한다.
이 때 절이 크게 중건됐다.
영릉에 갈 때 같이 들려 보고 싶다.
이 사찰에는 조선 후기 세도가인 김병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김병기는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조순의 손자로, 당시 세도가였던 김좌근의 양자로 들어간다.
스물 아홉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보통 장원급제를 해도 종 6품 벼슬에 임명됐던 것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웠으면 出六 이라는 명칭까지 있었다고 한다) 첫 벼슬을 사옹원도정이라는 정 3품으로 시작했으니, 그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 하다.
헌종 때 세도 정치를 하던 순원왕후가 고모인데, 불심이 깊으셨는지 김병기에게 명하여 송광사 중건을 후원했다고 한다.
현판에 쓰여진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무척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해박한 지식으로 역사적 인물과의 관련성을 설명해 주니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순천 송광사는 2000 칸이 넘는 대찰인데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홍석주의 현판이 걸려 있다.
송광사는 삼보사찰 중 열 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 잘 알려졌다.
홍석주는 풍산 홍씨로 혜경궁 홍씨의 일문이고 그 동생 홍현주가 정조의 외동딸인 숙선옹주의 남편 영명위다.
정승을 지내고 학식도 높아 당대의 거물 정치인이었는데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송광사를 방문하고 그 풍경과 절 규모에 감탄하여 현판을 남겼다.
이 때 마중나온 승려가 2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절인지 알 만 하다.
현판이 보다 전문적으로 연구된다면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김정희가 쓴 현판 이야기도 나온다.
양산 통도사에 화악 스님의 진영도가 있는데 그 분을 모신 곳에 현판을 썼다.
그 중 당나라 어떤 스님이 추워서 목불을 땔감으로 쓴 걸 두고 허상 대신 실제를 구하라는 고사가 등장한다.
어렸을 때는 이 말이 맞다 생각했으나 나이 들어 다시 생각해 보니, 像 도 하나의 실체일 뿐 굳이 허상이네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정말 모든 상징을 다 무의미 하다 배격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를 찾아라 하는 것도 말을 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적 깊이가 깊은 대학자만이 평할 수 있는 말 같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책이고 많이 알려져 우리 절의 내력에 대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길 바란다.
기왕이면 컬러 사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전통문화로서의 불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대접받고 연구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불교 관련 서적들을 더 많이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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