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왠지 어려워 보여 뒤로 미뤄 놨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내친 김에 읽게 됐다.
최근 들어 현대미술에 부쩍 관심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인상처럼 아주 쉽지는 않았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과 80년대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지,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의 주제의식은 무엇인지 등을 찬찬히 짚어 준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1부는 개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 실린 구겐하임 미술관 편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미술관이 미술 사조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페기 구겐하임 개인의 안목과 후원이 잭슨 폴락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대중화되기 이전의 추상주의를 비평가도 아닌 일개 개인이 막대한 돈을 들여 후원했던 걸 보면 (물로 뒤샹 등의 조언이 있었지만) 페기 구겐하임의 안목이나 취향이 참으로 날카롭고 시대를 앞서갈 만큼 진취적이었던 것 같다.
국가 주도의 후원보다 미술관이나 기업 비영리재단 등의 구매와 전시를 통한 후원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술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도 많았다.
이를테면 미술을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저항이자 이데올로기로 생각하자는 8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 비평가들의 주장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특권화된 엘리트 비평가들이 주도권을 잡아 대중을 이끄는 것일 뿐이고, 실제 미술 시장에서 부호들에 의해 이런 미술품들이 고가에 거래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고 미술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현실을 놓고 보면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 계급의 작품 구매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작가주의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100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지극히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주체성을 가지고 어떤 주의나 사조에 함몰되지 않고 나 자신의 욕구를 양식의 구애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 얌전하게 기존 체제의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고 주류 가치관을 오히려 공격하는 것, 무엇보다 1세계 백인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3세계, 여성, 유색인종과 같은 주변 계층의 입장에 눈을 돌린다는 점 등에서 이러한 독립적, 비판적 흐름은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회화는 종교적이고 사회순응적이며 예쁘게 그려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했다.
대중들은 그저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른다, 높으신 분들의 말이 다 맞다, 나는 그림 볼 줄 모른다, 이런 자세로 수동적인 관람객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람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점, 가치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주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보다 열린 미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 가치 자체를 상실해 버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된 것 같은 억지 평론은 오히려 대중과 미술을 떨어뜨려 놓는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책에 나온 작품들은 내 미적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고, 저자의 해설도 너무 억지스럽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술이란 뭔가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대상이 아닌 서술을 택한, 작품이 속한 사회의 맥락을 중요시 한 오늘날의 현대 미술은 보편적인 미적 가치에 너무 위배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괴물시대>를 보면서 현대미술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생각할 꺼리를 주고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막연하게 나는 현대미술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직접 눈으로 보니까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있기도 했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꼭 맞지 않더라도, 가이드의 해설과는 무관하게 그냥 나만의 감정변화가 있었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도 심지어 작가의 죽음을 선언할 정도로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관람객 각자의 열린 해석이라고 했으니 그런 면에서는 부담을 좀 벗어 버려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양식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든 조형미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르난도 보테로가 소개됐는데 얼마 전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직접 갔다 와서 굉장히 반가웠다.
더이상 양식의 파괴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으로의 회귀도 하나의 선택으로 보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창의성의 신화를 깨부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장에 보테로도 해당된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기존의 명작들을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신선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깊이가 없단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바로 그가 지향하는 키치적 감각이라고 한다.
강렬한 원색, 단순한 윤곽선, 매끈한 채색, 크기의 확대를 통한 양감 표현이 보테로 예술의 특징이다.
이런 키치적 느낌, 신선하면서도 가볍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보테로처럼 어떤 심상이라도 이끌어 내야 하는데 여기 소개된 설치미술 등은 뒤샹의 변기를 보듯 정말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직접 전시장에서 보면 또 다를까?
형상보다는 개념을, 오브제 보다는 아이디어를 선택한 포스트 모더니즘.
서사적 구조를 추구하더라도 미술의 기본은 보편적인 미적 감수성을 건들 수 있는 조형미에 있다는 생각을 아직까지는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를테면 내가 르네상스 그림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고 그 문화에 익숙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미적 가치를 내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인정을 덜 받는 것은 서구식으로 세계화가 됐기 때문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주체적인 관점은 좋은데 너무 나가다 보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 하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니 어쩌면 평론이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순수 기하양식의 상징성과 기의를 깨트린 피터 핼리의 주장에 일견 동의하는 바다.
사진을 보니 핸섬하게 생겨 호감이 간다.
예일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평론가였다는 이력 때문인지 지적으로 보였다.
몬드리안이나 말례비치 등이 주장한 절대적 아름다움,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다 배제한 순수한 미의 원형인 기하학적 형태가 실은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공간인 병원, 학교, 관공서 등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므로 기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20세기 추상미술 서적들을 읽으면서 말례비치의 절대주의 주장에 정말 동의하기 힘들고 억지스럽다고 느꼈는데 이걸 지적해 주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핼리는 오히려 그러한 모조품으로서의 기하학을 이용해 신화를 깨트린다.
최소한의 조형을 이용한 미니멀리즘적 양식과, 팝아트의 키치적 감각을 더한 혼성미술이 바로 핼리 등이 추구하는 Neo-Geo 즉 모조추상이라고 한다.
일본 여성 작가로 마리코 모리가 소개됐는데 코스튬 플레이 하는 모습이 꼭 낸시 랭이 생각났다.
나는 이 여자를 도저히 예술가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내가 현대미술에 무지한 탓인가? 

작품의 해석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현대미술에 대해 개념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괜찮은 책이다.
벌써 나온지 10여 년이 흘렀으니 이 책도 아주 최신 경향은 아닌 셈이다.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좀 더 많이 읽어 보고 무엇보다 직접 전시회장에 가서 눈으로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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