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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다른 책을 고르려다가 자꾸 눈에 밟혀 집어든 책인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럽다.
안휘준씨의 <한국 미술의 美>를 읽을 때처럼 문장이 고풍스럽고 전문성이 녹아 있으며 우리 화가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앞의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안휘준이라는 사람이 누군가 했는데 유홍준씨의 지도 교수였다는 걸로 봐서 꽤 나이가 있고 이 분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로 존중받는 것 같다.
2권은 혹시 1권에 실망할까 봐 일단 읽어 보고 빌리려고 같이 안 빌렸는데 뜻밖에 너무 재밌어 2권을 빌리러 갔더니 그새 누가 대출해 가버렸다.
아쉽지만 며칠 기다려야지.
여러 점의 그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딱 네 명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어 책의 밀도가 높다.
저자는 총 여덟 명의 화가들을 10년에 걸쳐 역사비평에 연재했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이 놀랍고 연재물이라고 보기에는 완결성이 뛰어나다.
특히 책의 1/3을 차지하는 겸재 정선 편은 저자가 공을 들인 만큼 화가의 높은 격조와 뛰어난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도판이 작아 큰 산 밑의 선비나 나귀 같은 작은 형상들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도 전체를 보여줄 때 보다, 클로즈 업 하여 부분을 확대시켜 놓으니 그 생생한 붓맛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진품을 보지 못하는 이상, 또 설사 본다 해도 잠깐이니 기왕이면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확대해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 등장인물은 인조 시대 화가인 연담 김명국이다.
사실 이 분의 그림은 달마도 밖에 몰라서 대체 왜 유명한지 의아했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된 <심산행려도>나 <설중귀려도>를 보니 과연 신필이구나, 무릎을 탁 쳤다.
눈 오는 산 속에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의 모습은 비록 큰 산에 가려 아주 작게 그려졌지만 그 필선이 자못 정교하여 거대한 자연 속의 인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그는 취기가 있어야 그림을 그리고 꼼꼼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일필휘지로 단번에 쓱 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도를 보인다기 보다는, 천재성이 돋보이고 奇格이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에 두 번이나 참여할 정도로 일본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일본인이 달마도 같은 속필화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나도 들은 것 같다.
또 분청사기에도 열광한다는데 왠지 둘 다 비슷한 느낌이 든다.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전설만 많을 뿐 실제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은 유명한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다.
이 분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고, 처외증조부가 이수광이며, 성호 이익과 그 형 이우가 친구이고, 다산 정약용이 외증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약용의 전기에서 윤두서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윤두서의 그림으로는 그 자화상이 매우 유명하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꼼꼼히 그린 걸 보면 과연 전신을 그리는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생각이 들고, 그 형형한 눈빛을 보면 얼마나 기개와 자부심이 높았을지 성격됨도 짐작이 간다.
잠깐 생애를 훑어 보면 15세의 나이에 혼인하여 18세에 첫 아들을 두고 아내와 사별한 후 다시 장가들었는데 평생 9남 3녀를 뒀을 만큼 부인과 사이도 좋고, 다복했다.
아들을 이렇게 많이 뒀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큰 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유배된 후 남인 계열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진사 합격 후 평생 벼슬길이 막혔고 겨우 48세에 졸하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48세에 열 두 아이의 아버지라니, 좀 놀랍기는 하다.
15세에 장가든 걸 보면 2차 성징이 시작하자마자 곧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그 아들 중 윤덕희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나물 캐는 여인>과 같은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남겼다.
윤두수의 또다른 명작으로는 친구 심득경의 초상화가 있다.
이 그림은 전문 화원들의 천편일률적인 초상화와 달라 개성적이고 신선했다.
일반적인 초상화가 채색을 진하게 하여 좀 부담스럽다면, 심득경의 초상화는 은은한 맛이 있고 담백하다.
정말 전문화원과 선비화가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말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는데 솔직히 내가 보기엔 데생 실력이 썩 좋지는 않다.
말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해 관념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역동적인 그림을 시도했다는 점은 알겠지만 먹의 한계라고 할까? 서양화가들의 놀라운 묘사력에는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말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비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수묵화의 멋은 정밀한 묘사보다는 아련한 분위기와 잡힐 듯 말 듯한 정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록산수화 중 하나인 낙마도가 나오는데 다른 책에서 이에 관한 중국 고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지 유머러스 하다고만 되어 있어 관련 고사를 모르는 건지 그냥 넘어간 건지 의아하다.
자긍심이 높아 주문을 받았던 겸재와는 달리 평생 몇 점 그리지 않았고 대작보다는 인물 표정을 주로 묘사하는 소품에 능했다고 한다.
또 백성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아 실제적인 학문을 추구하고 그들을 직접 관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저자는 이런 공재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진경산수화를 낳았다고 평한다.
요켠대 숙종대의 이런 문화적 바탕 위에서 영정조대의 문예부흥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관아재 조영석이다.
이 분의 그림은 얼마 전에 다녀온 경기도립박물관에서 봤다.
형 조영복의 초상화였는데 엷은 분홍색으로 도포를 칠하고, 얼굴 표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잡아내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르다 싶었는데 이 작가가 바로 조영석이었다.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처럼 조영석의 초상화도 전문화원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
또 이 초상화는 손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보통 손을 생략하는데 자연스럽게 무릎에 놓여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열 네 살에 부모를 잃고 평생 의지했던 맏형 조영복이 신임사화로 유배가 있을 때 직접 찾아 뵙고 그린 초상화라고 한다.
유배지에서 그린 초상화이니 무척이나 애틋했을 것 같고 형제지간에 우애도 깊이 배어 있을 것 같다.
이 조영석네 집안은 노론의 명문으로 조부대부터 김상헌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손자인 김창협에게 다시 아들이 배우는 등 노론 거족 안동 김씨와 인연이 깊다.
조영석은 김창협의 처남인 이희조에게 배웠는데 마침 부모가 일찍 죽은 조카가 있어 역시 고아가 된 제자와 결혼시켰다.
그 역시 공재처럼 15세에 혼인하였다.
그의 친구로는 시로 유명한 사천 이병연이 있고, 그림으로 유명한 10세 연상의 겸재 정선이 있다.
이들의 교유는 평생을 두고 예술적 빛을 발하였다.
기록이 없는 겸재의 경우, 그나마 조영석의 찬문이나 애도문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관아재는 워낙 인물화를 잘 그려, 형 조영복의 초상화를 직접 본 영조가 감탄하여 그를 어진화사로 지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양반 사회에서 그림이란 환쟁이나 그리는 매우 천한 기예였기 때문에 선비가 붓을 잡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 여겨졌다.
겸재의 경우 주문까지 받아 그림을 그렸으나 (그래서 중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명문 노론 거족인 관아재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임금이 직접 명하는 일이니 못 이기는 척 그 재주를 발하면 좋았으련만, 왕명을 어겨가면서까지 거부하여 파직됐다.
왕이 위급할 때 양반도 약방문을 지을 수 있지 않냐는 말에, 그림 그리는 일은 위급한 일도 아닐 뿐더러, 약방문은 지을 수 있으되 직접 붓을 쥐는 것은 임금의 치질을 핥으라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으니, 그의 거부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예술이 이처럼 천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현실이 안타깝고, 재능있는 선비화가들도 전문적인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문인화에서 멈췄어야 함이 아쉽다.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이만큼의 성취를 얻은 걸 보면 타고난 화가임이 분명한데 좁은 문인화의 폭에 안주해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더래도 충분히 서양 화가들과 대적이 되지 않았을까?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평생 외관 말직으로 떠돌았으나 말년에는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마지막은 겸재 정선이다.
이 분의 위대함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많은 그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를 꼽는다면 단원 김홍도와 함께 이 분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사실 인물화는 썩 잘 그린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분의 장기는 바로 산수화에 있다.
특히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그 대담한 구성과 웅활한 필선에 전율하게 된다.
정말 최고의 명작답다.
특히 바위 그림이 예술이다.
양감과 날카로운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런 진경산수화가 숭명배청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을 받들지 않게 된다.
이제 중원 대륙에 중화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에서 중화사상을 이어가자.
이른바 소중화주의 때문에 중국의 모방 풍조를 버리고 우리 것에 눈을 뜬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민족주의와는 다른 양상임을 설명한다.
내 민족의 것을 사랑하고 자부심이 높아졌다기 보다는,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망해가는 명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나, 어쨌든 이제 중국 대신 우리 자신의 것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게 됐다.
확실히 화보를 보고 베낀 그림은 엇비슷하고 활기가 부족하다.
대신 직접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은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
금강산을 그린 금강전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강변을 그린 <경고명승첩>이나 임진강변을 그린 <연강임술첩> 등은 그 풍경이 정말로 생생하다.
특히 <연강임술첩>은 경기도립박물관에서 임진강 특별전을 할 때 사진으로나마 감상을 하여 더욱 반가웠다.
경기 관찰사 홍경보가 삭령을 순시한 후 연천으로 가기 위해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웅연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마침 임술년 시월 보름이나 소동파가 뱃놀이 하면서 읊은 <후적벽부>를 따라 하려고 시로 유명한 연천군수 신유한을 불러 문장을 짓게 하고, 그림은 양천현령인 정선에게 맡겼다.
과연 양반의 품격있는 놀이문화답다.
겸재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연줄을 통해 김창집의 빽으로 벼슬길에 오른 만큼, 큰 직책은 못 맡고 외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비록 명예직이나 당상관에 올라 삼대가 추증되는 영광을 누린다.
현재 심사정이 그의 제자다.
70이 되어서는 벼슬을 내놓고 백악 밑에 인곡정사라는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 관아재와 사천 이병연 등과 교류하면서 말년의 예술혼을 불사른다.
<박연폭포>와 같은 힘이 넘치는 대작이 80이 넘어 완성됐으니 과연 이 화가의 정력이 놀랍다.
그는 84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뜬다.
손자 정황이 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을 포함하여 동양권에서 수묵화로 우열을 가린다면 과연 우리 화가들의 작품은 몇 점이나 들어갈까?
조선 화단에만 그칠 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체를 대상으로 품격있는 그림을 가린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지역 안배 이런 거 말고, 정말 역대 화가들끼리 진검승부를 겨뤄 봤으면 좋겠다.
겸재 정선이라면 중국 유명 화가들의 명성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에는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된 남태응의 <청죽화사>가 실려 있다.
당대의 화가를 논하는 책으로 냉철한 지적이 간담 서늘하다.
김명국과 윤두서, 이징을 비교한 화론에서는 이징을 가차없이 비판하여 김명국과 윤두서가 더욱 돋보였다.
2권에도 네 명의 화가들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내가 좋아하는 표암 강세황은 없다.
그렇지만 단원 김홍도가 포진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읽어봐야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우리 전통 문화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 옛 화가들의 걸작들이 새롭게 평가받길 바란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에도 이용되지 않고 (이를테면 민족주의, "우리 것이 최고여' 주의)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화에 지식이 좀 생기면 중국화와 일본화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다.
마침 중앙박물관에서 겸재 정선展이 열리니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