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
조유전 이기환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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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쟁하다가 못 버티고 항복한 것을 두고 청 태종이 함락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기술한 것은 과연 "민족정기"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것은 마치, 역사스페셜에서 가야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순장자의 시신을 소중하게 매장했다면서 강압적으로 매장한 중국과 달리 자발적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이 빛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난공불락의 요새면 대체 왜 인조가 겨우 한 달 반 만에 나와서 항복 문서를 바쳤겠는가?
혹시 인조가 백성을 너무 사랑해서 고려 때 무신정권처럼 수 십년을 항전할 수 있었는데도 애민정신 때문에 스스로 항복한 걸까? 설마, 인조가?
몽골군이 수전 경험이 없어 강화도를 건너지 못했다는 해석과도 비슷하다.
이런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역사 해석이야 말로 우리 선조들이 걸어 온 길을 밝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 싶다.
정말 우리 사학계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식민사관 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우월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자국의 역사를 해체하는 작업도 한다던데, 냉정하게 실체를 분석할 만큼 베짱과 자신감이 생기려면 우리는 아직도 멀었구나 싶다. 
무령왕이 양 무제로부터 하사받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두고 요즘으로 치면 외국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에 불과하다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대 세계에서 사대주의가 큰 나라 옆에서 독자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생존해 가는 훌륭한 외교술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을, 명백하게 중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신하로서 조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걸 인정하면 백제의 자주성에 (혹은 대한민국의 자주성에) 큰 해라고 되는 양, 요즘의 명예학위 따위에 불과하다고 깍아 내리는 건 정말 비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학자들이 한중일 세 나라에 널려 있으니 아직도 동북공정이니, 임나일본부설이니 하는 게 자국에서 힘을 얻고 있지 않겠는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무덤 양식이고 한반도에서 그것이 발견됐다면 양국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 아닌가?
이것을 두고 부득불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로 삼으려는 일본이나, 그럴 위험이 있어 절대 그런 무덤 형태가 아니라고 부인하여 아예 조사도 안 하려는 한국이나 정말 한심스럽다.
얼마 전에 고종석의 칼럼에서도 읽은 바대로, 좀 더 세계시민적인 인식을 갖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 일본의 금각사 등을 이해 관계 없이 편안하게 즐기며 자랑스러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고구려가 남진하였을 때 거점성만 정복하고 주변까지 통치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고구려는 마치 제후국에 조공을 받는 천자국을 자쳐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말 억지스럽다.
주변까지 직접 통치할 수 있을 만큼의 국력이 안 됐기 때문에 선적으로 중요성들만 점령하고 지나갔다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지, 이걸 두고 천자국 운운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식민 사관의 정반대말은 혹시 민족사관이 아닐까?
칠지도 얘기도 해야 할 것 같다.
백제왕이 하사를 했는지 아니면 신공황후에게 헌상을 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어떤 나라든 자기 나라 위주로 역사서를 해석하려고 하는 법이니 적당한 선에서 이해하면 될 일을, 그 칼을 처음 발견한 일본인의 출신 배경을 근거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훼손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건 정말 코메디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에서도 일본인이 칠지도를 훼손하는 장면을 보고 이런 나쁜 놈들! 하고 부르르 떨었는데 정작 나쁜 사람은 아무 근거도 없이 막연한 추측만 가지고 훼손했네 어쩌네 하는 사람이 아닐까?
오히려 일본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자기네 역사책에 칠지도를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 그나마 주장할 근거라도 있다.
일본서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 이러다가도 백제에 유리한 기록이 나오면 얼른 인용하는 아전인수, 견강부회의 태도는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비는 일본 장교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도 수없이 탁본이 떠졌기 때문에 훼손 운운하는 게 난센스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부득불 책에 훼손 가능성을 싣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언젠가 읽었던 책인데 이상하게 감상문이 없어서 읽었나 안 읽었나 헷갈렸지만, 예성 동호회의 중원 고구려비 발굴기를 읽으니 한 번 봤던 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때도 아마 신문상에 연재된 글을 모으다 보니 깊이가 부족하고 에피소드 위주였다고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본격적인 학술서라고 보기에는 너무 잡다한 내용이 많지만 그래도 필자가 직접 참여한 발굴 뒷얘기를 듣는 건 흥미롭다.
광주의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옹관묘가 마한 시대 것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막연히 청동기 시대 유물이겠거니 했는데 마한이라는 국가와 연결되니 굉장한 유적지처럼 느껴진다.
삼국 시대 외에는 고대 국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신선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고대의 역사는 참 기록이 없다.
창원 다호리 유적지에서 붓도 발견되고 오래 전부터 한자를 써 왔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남은 기록들이 없을까?
조선왕조의 그 엄청난 실록만 생각해도 기록하길 좋아하는 민족이 분명한데 말이다.
제대로 된 역사 정립도 안 되어 있는 기원전후 시기에 이미 로마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이집트는 무려 5000년 전의 왕조까지 복원된 걸 보면 기록 문화가 부재된 우리의 고대사 복원 현실이 참 아쉽다.
결국 열심히 고고학적 발굴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밀양 송은 박익묘의 벽화는 고려 시대에도 여전히 벽화 전통이 남아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해 줬다.
나는 벽화라고 하면 고구려 시대에나 있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말선초에 죽은 박익묘를 우연히 발굴하게 됐는데 그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고 하는 걸 보면,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벽화 전통이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박씨 문중에서는 유골에 손도 못 대게 해서 그저 눈으로 부패되지 않은 시신을 관찰하기만 했다고 하는데, 달리 생각하면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조상이 널리 알려지면 그것도 그 분이나 문중을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족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상의 무덤을 오늘날까지 잘 관리해 온 것은 조상의 묘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전환을 통해 과학적인 발굴과 연구야 말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좀 더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고학 발전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천마총을 발굴했을 때도 경주 김씨 일문에서 왕릉이 분명한데 마치 말 무덤인 것처럼 천마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며 국회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는데 우리나라의 조상 숭배 전통이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이렇게 고루하고 인습적인 장면을 접할 때면 한숨이 나온다.
서구 문명이 온 나라를 뒤덮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대의명분과 "정신적인" 것에 집착하는데 성리학 교조주의 일색이었던 조선 시대는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고대사에 대한 미스테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흥미로운 발굴 경험과 관련 지식을 가볍게 풀어 쓴 대중을 위한 발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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