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생활사 1 조선시대 생활사 1
한국고문서학회 지음 / 역사비평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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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서가를 뒤지다가 발견한 책이다.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생활사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일단 믿음이 갔다.
여러 필자들이 나눠서 작업을 한 탓에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은 부족하지만 자료가 믿음직해서인지 신뢰가 갔다.
기왕이면 여태까지의 성과물을 가지고 한 두 사람의 필자가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봤더니 2권도 나왔다.
집집마다 전해져 오는 고문서들이 많이 번역되서 보다 구체적인 조선시대 일상이 재현되길 기대한다. 

여러 책에서 확인한 바지만, 아무래도 내가 여자이다 보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익히 알려진대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게 완전히 종속된 시기는 유교 규범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제화된 18세기 무렵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명나라가 망한 후 소중화 의식이 하늘을 찌르면서 삼종지도 등의 유교적 여성 덕목이 사회 전체에 퍼졌던 것 같다.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율곡 이이를 낳고 일곱 살 때까지 강릉에서 아이를 키웠다는 게 옛날에는 잘 믿기지 않았는데 이 때만 해도 임진왜란 전이니 남귀여가혼이라는 풍습이 남아 있을 때가 아닌가.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던 만큼 신부를 맞이하려면 사위가 처가에서 어느 정도 일을 해 줘야 했을 것이다.
김유정의 <봄봄>에 잘 묘사된 것처럼 말이다.
사위 역시 처가에서 첫 아이를 키울 동안 봉사하는 대신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었을 것 같다.
당연히 아들이 없더라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연 관계를 더 중시하여 딸의 자손인 외손자가 제사를 받들고 재산도 물려받았다.
아들이 없을 경우 문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아니라, 직계 혈통인 외손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니 어찌 보면 이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정리에도 맞다.
고려 시대만 해도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족보에 기재하고 재산도 당연히 균등상속 됐으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적장자에게 모든 권한이 상속됐다.
이 점은 후기로 갈수록 재산 증식이 어려웠기 때문에 큰아들에게 밀어 줌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부모가 공양받을 수 있었다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 나온 바대로 규범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또 바뀐 사회 환경에 문화나 예의범절도 적응해 나가야 하니 여성의 지위 역시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글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평민이나 노비층의 생활상도 흥미로웠다.
한문을 알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로써는 복잡다단한 법률이나 규범 등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더더욱 한글이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 같다.
한문을 아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에 양반층으로서는 굳이 한글을 보급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문자를 깨우치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발상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일 뿐더러, 양반들과 특권을 다툴 필요가 없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다 내 백성이라고 생각한 절대 군주의 넓은 포용력이 느껴진다.
이두가 오랜 세월 동안 한문과 더불어 우리말과 한자의 조화를 도운 만큼 시간이 갈수록 한문화 되어 한글이 발명된 이후에도 굳이 한글로 대치될 필요없이 계속해서 한자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단순히 글자만 만들면 끝이 아니라 사용 환경을 조성하려면 많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노비의 경우 一賤卽賤 이라는 법에 따라 한쪽만 천민이어도 자손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신분 내에서만 혼인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점이 이해가 잘 안 갔다.
여종이 양반의 첩이 되는 경우 그 자식은 노비가 된다는 종모법 정도만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노비와 양민간의 결혼도 흔했다고 한다.
특히 권세있는 양반의 노비 같은 경우 혼인을 하면 자손이 곧 노비가 되서 재산이 증식하기 때문에 일반 양민과 결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내 혼인은 특권을 지켜야 하는 양반층에서만 폐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의 계층은 반드시 족내혼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비와 결혼한 양민의 경우 주인집에 경제력을 의존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더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 호적도 주인에게 편재되고 결과적으로 주인의 세력 범위를 넓히는데 이용됐다.
또 주인의 임의대로 처분됐기 때문에 한 가족을 이루고 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임란 당시의 기록을 남긴 오희문의 쇄미록을 보면 70이 넘어서 죽은 여종 이야기가 나온다.
전란 중이라 주인집도 먹을 게 없어서 늙어가는 여종을 병구완 하기 힘든 게 당연했겠지만 식량 축내기 전에 빨리 죽어야 한다는 주인의 일기는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당시 노비 계층의 비참함이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나 씁쓸했다.
70이 넘게 집에서 부렸던 노비의 죽음에 대한 상념이 애완견의 죽음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출을 못하고 종합자료실에서 읽은 책이라 꼼꼼하게 보지는 못했다.
2권은 정식으로 대출을 해서 제대로 읽어 보고 싶다.
더불어 느낀 점은 역시 한자에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틈틈히 책에 나온 한자들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기본적인 글자는 익히고 있지만 이런 옛 기록들을 보기에는 아직은 너무 일천하다.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한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중국에서도 구어체를 글자로 쉽게 표현하기 위해 백화체를 쓴다고 하니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했던 조선시대 양반층의 문자 생활 수준은 정말 상당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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