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비열전 -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임중웅 지음 / 선영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전공한 사람의 책이 아니라 걱정이 되면서도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했다는 문구에 혹해서, 또 왕비에 관한 기록이 워낙 적기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됐다.
다분히 자극적이고 상상력을 동원한 기술들이 마치 사실인양 기술된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실록을 꼼꼼하게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완전히 실패한 선택은 아니었다.
역사학자가 쓰더라도 획기적인 자료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역사적 사실 부분에 있어서는 이 책과 대동소이 할 것 같다.
마치 고대사 연구에 있어 워낙 자료가 적어 어쩔 수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것처럼, 왕비들에 관한 기록 역시 너무 적어 자칫하면 야사류로 빠지게 되는 오류를 피하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가지 소득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왕비들에 대해 단편적인 사실이나마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세도정치 하의 무능한 왕 정도로만 알려진 헌종의 경우 두 왕비들 역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나마 최근에 박물관에 다니다 보니 헌종이 도장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의외로 문화적인 취향이 고상하고 보소당인존 같은 책을 펴냈다는 걸 알게 됐다.
창덕궁 답사를 통해서 낙선재가 바로 헌종의 후궁이었던 경빈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바로 그 헌종의 첫 왕비가 효현왕후 김씨다.
겨우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김조근의 딸과 가례를 치룬다.
10세에 왕비에 책봉된 이 소녀는 불행히도 1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헌종은 14세의 소녀를 계비로 맞는데 이 사람이 바로 드라마 명성황후에 등장하는 효정왕후 홍씨다.
이 분은 헌종보다 네 살 아래였는데 헌종이 겨우 2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에 비해, 73세까지 천수를 누린다.
헌종이 낙선재를 지어줄 만큼 사랑했던 여인 경빈 김씨는 다른 책에서는 삼간택에서 탈락해 후궁으로 들였다고 본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순원왕후가 계비인 홍씨를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일족인 김씨를 후궁으로 들였다고 했다.
그녀는 비록 2년 후 헌종이 젊은 나이에 사망해 과부가 되지만 1907년까지 생존했고 고종이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여 순화궁이라는 궁호까지 내려 줬다고 한다.
77세까지 살았으니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를 (83세) 포함해서 구한말에는 여성들이 장수했던 것 같다. 

철종의 가계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게 됐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왕위를 이어갔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정리가 된 기분이다.
드라마로 워낙 많이 만들어져 사도세자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익숙한 느낌이 든다.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에게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고, 빙애 (경빈 박씨)에게서 은전군을 낳는다.
은언군의 손자가 원경과 원범인데 원경은 역모 사건으로 죽고 은언군 역시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도라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다.
부모 잃고 강화도에서 불행하게 자라던 원범이 순원왕후에게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가자 사약 먹고 죽은 은언군은 신원된다.
살아서는 비참했으나 아들 덕분에 죽어서는 존귀해지는 대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은언군의 아들이 바로 홍국영이 죽은 누이 원빈의 양자로 들이려 했던 상계군이다.
은언군의 3남이 철종의 아버지 되는 전계군이다.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신군은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데 바로 이 사람이 흥선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은신군의 현손이고 사도세자의 5대손이 되는 셈이다.
철종도 33세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자식이 없어서 불임인가 했는데, 가계도를 보니 다들 아기 때 죽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영혜옹주로 박영효에게 시집간다. 

세자빈이나 중전으로 간택되는 나이는 겨우 10여세 전후인데 특히 놀라웠던 인물이 바로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다.
그녀는 겨우 아홉 살 때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순종의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영조가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와 혼인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겨우 아홉 살 짜리 꼬마 아이를 스물 아홉의 세자에게 짝지워 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아마도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보통 고종이나 민비에 대해서는 왕조 말기의 불행한 통치자들로 연민의 정을 갖고 서술되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들에 대해서도 꽤 비판적이다.
민비가 무당이나 굿에 엄청난 재화를 낭비했던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고종이 자동차를 사기 위해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넘겨 줬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왕조국가의 군주를 현재의 눈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고종이나 민비 모두 난세를 헤쳐나갈 지도자감은 못 되는 것 같다.
차라리 고지식 하더라도 자기만의 비전을 확고히 가진 흥선대원군이 지도자로서 더 자질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름 재밌게 읽었고 왕비나 후궁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어 무척 아쉽다.
얼핏 듣기로 왕비실록 이런 책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왜 실록처럼 공식적인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좀 더 많은 발굴이 이루어져 조선 왕실 가족의 인간적인 면이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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