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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미술문화
이성미 지음 / 대원사 / 2005년 12월
평점 :
조선시대 미술에 대해서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서양의 화려한 미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개성적인 일본 미술에 비해서도 내세울게 별로 없는, 그저 중국 미술의 아류 정도로만 생각했다.
먹과 묵으로 된 자연 풍경은 사실적이지도 않고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았다.
화려하고 정교한 르네상스 그림을 동경하는 내 취향에 산수화나 수묵화는 도무지 맞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산회상도를 처음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그렇게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10m는 충분히 넘었을 거다) 천여명에 가까운 인물들을 그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고 그림은 본다기 보다는 그 뜻을 읽을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즐긴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 후로 불교 미술 뿐 아니라 우리 그림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그저 화가라고 하면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솜씨의 화가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특히 강세황처럼 문인화가들이 격조높은 시와 함께 우아한 필선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았다.
산수화가 시시했던 것도 내가 거기에 나오는 중국 고사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뭘 그린 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 그림을 알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하듯 말이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최한 <왕의 글이 있는 그림전>은 조선 시대 국왕들의 미술 취향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에서 방황한 국왕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숙종이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는 걸 알고 나니 마치 역사 속의 박제화된 인물이 살아 숨쉬는 생동감 있는 인간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헌종 역시 세도 정치에 휘둘린 임금이었다는 게 내 지식의 전부인데 사실 그는 서화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그의 후원을 받아 왕실 미술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송나라의 휘종이 훌륭한 화가에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정치에 무능했듯 헌종 역시 비록 정치에서는 별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시서화를 사랑하는 꽤나 매력적인 국왕이었던 것 같다.
전혀 관심도 없던 헌종 시대가 눈에 잡히듯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결국 인간의 감수성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 보편성을 갖는다는 걸 느낀다.
서양의 화려한 미술의 역사를 보면서 내심 부럽고 왜 우리는 저런 미술 문화가 없었을까 아쉬웠는데 다만 우리는 그 전통을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을 뿐 역시 우리도 왕실에서 미술을 후원하고 예술을 즐기는 귀족 계층들이 있었다.
예전에 러시아전을 관람한 후 러시아 미술의 위대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이번에는 조선의 최상류층이 즐기던 미술 문화에 눈을 뜨게 됐다.
따지고 보면 문인화는 단지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하고 나라일을 보는 학자이자 관료들이 여기로 자신들의 시에 그림을 덧붙이는 것이니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격조 높은 계층이었을 것 같다.
특히 강세황의 그림을 보면 전문적인 화원도 아닌데 어쩜 저렇게도 잘 그릴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조와 김홍도의 관계도 책에 자세히 묘사된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신윤복의 얘기는 기록에 없던 탓인지 안 나오지만 대신 그 아버지 신한평은 어진화사로 일할 만큼 당대의 뛰어난 화가였다고 한다.
왜 그런 훌륭한 그림들이 많이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 그 점이 참 안타깝다.
정조란 인물은 예전부터 르네상스를 일으킨 훌륭한 중흥의 군주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정말로 매력적이고 대단한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 역시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하지 않았을까 아쉽다.
정조는 신하들을 휘어잡을 만큼 뛰어난 정치력과 대담한 베짱을 가지고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문집을 남기고 무인 기질도 출중하고 그림과 글씨에도 능한 팔방미인이었던 것 같다.
정말 박현모씨 의견대로 40대에 과로사를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다방면에 출중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나 진경 산수화도 정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활성화 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 자신도 괜찮은 화가였던 것 같다.
비록 동양화를 평할 능력은 안 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을 보면 그의 우아하고 격조 높은 그림에 대한 취향이 눈에 보인다.
조선 왕실의 미술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고 무엇보다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어 도움이 많이 됐다.
이성미라는 노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으로 제자들이 출간한 책인 모양이다.
스승에게 훌륭한 선물이 될 것 같다.
무능하게만 느껴졌던 조선 왕실이, 궁궐과 그림에 관심이 생기면서 새롭게 와닿는 기분이다.
결국 선조들에 대한 자긍심은 전통의 연계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가 그 문화를 향유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 같다.
조선 시대 그림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볼 생각이다.
유익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