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 정신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종교개혁의 투사 즐거운 지식여행 20
그레이엄 톰린 지음, 이은재 옮김 / 예경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터에 대한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일종의 혁명아 같다는 이미지와 함께, 독일 농민 전쟁이 있었을 때, 그들을 때려 잡으라고 선동했다는 에피소드가 겹치면서 좀 위선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루터에 대한 비교적 공정하고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이게 전기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루터교는 일종의 국가 교회주의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좀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루터교가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모든 개신교의 기본이 되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다는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근본주의의 원류인 셈이니, 여전히 루터교는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95개조 반박문을 잘 읽어 보면 처음부터 종교개혁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천박한 논리로 면죄부를 파는 추기경의 행태였고 그것이 오히려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킬까 봐 염려됐다.
루터 뿐 아니라 당시 학식과 믿음이 있던 성직자라면 누구라도 독일 지역에서 판매되는 면죄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교황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일개 수도사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게 괘씸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사고를 하는 대신, 교회의 쇄신을 단행했다면 가톨릭은 분열하지 않았을까?
교회의 분열은 다양성의 확보, 믿음과 해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해 보이면서도 왠지 슬퍼 보인다.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을 거의 마리아 숭배교 정도로 격하시켜 보고 있고 타 종교는 그나마 전도의 대상으로나 보지, 가톨릭은 거의 이단시 하는 분위기다.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 역시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이제 해석의 자유가 넘치다 못해 상대의 믿음은 무조건 틀렸다는 교만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황의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루터의 가장 위대한 실패는, 교회 대신 권위의 원천으로 제시한 성경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믿겠다는 바로 오늘날의 근본주의의 발흥이 아닌가 싶다.

문자에 집착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인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체설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츠빙글리는 성만찬 때 "이것은 내 피와 살이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해 단지 상징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가톨릭과 루터는 정말로 예수의 살과 피를 신도들이 먹는다고 생각한다.
츠빙글리는 가톨릭과 루터교가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가톨릭은 혹시라도 예수의 피로 변한 포도주를 무식한 신자들이 흘리기라도 할까 봐 아예 포도주는 주지도 않고 빵만 입에 넣어 줬다고 한다.
본질을 놓치고 오직 글자에만 집착하는 기독교의 이런 행태는, 파고 들면 들수록 더욱 우스꽝스러운 꼴만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성체가 진짜 살과 피로 변하느냐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상복을 몇 달 입어야 할까를 두고 정치투쟁을 벌였던 과거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나는 비록 현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루터의 깊은 신앙심에는 어느 정도 감동받았다.
옳든 그르든 (사실 그런 판단조차 가능한 것이지 모르겠으나) 어떤 대상에 일생을 바쳐 몰입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삶을 진지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왠지 기품이 느껴진다.
또 어떤 의미로든 교황이라는 거대한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점은 역사적으로도 크게 평가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중세인치고는 63세라는 비교적 긴 수명을 누린 루터는 아마도 대단히 열정적이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보다 점잖고 온화했던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꺼려했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