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대 세계의 만남 -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 학고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만난 기분이 든다.
반납 기일이 지나서 못 읽고 갖다 줄 뻔 했는데,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읽게 됐다.
요 근래 독서에 대한 욕구가 시들해져 빌려 놓고도 그냥 반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좋은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 기쁘다.
사실 이 책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다.
1992년도에 쓰여진 책이니 벌써 20년 가까이 됐을 뿐더러,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것도 2006년이니 신간은 아니다.
도서관에조차 구입이 안 된 걸 보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데 다행히 희망도서로 구입해 줬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분량도 250페이지가 약간 넘고 내용도 체계적이며 쉬운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을 수 있다.
내 경우는 관련 지식을 찾아 보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하나의 전체적인 개념으로 정리되는 기분이다.
보통 문명의 교류라고 하면 콜럼버스의 대항해 이후를 생각한다.
15세기가 되서야 비로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고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됐다고 본다.
저자는 교역의 역사가 고대로부터 존재했고 그 범위는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입증한다.
아메리카가 신대륙으로 불리는 이유는 비단 서구적인 시각 때문만이 아니라, 그 교역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세아니아나 아메리카가 독자적인 발전을 한데 비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즉 구대륙은 고대로부터 이미 활발한 교역을 했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러므로 이미 구대륙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됐다고 본다.
책에서는 기술이나 문명의 전파 보다는 문화적인 것, 즉 종교를 주소재로 설명한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전파야 말로 문명 교류의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극동의 일본에까지 전해져 국교가 된 걸 보면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의 전파 역시 마찬가지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일상을 지배했고 기독교 역시 마니교나 네스토리우스파와 같은 변형종교로써, 마태오 리치가 중국 땅에 발을 딛기 한참 전부터 당 제국에 교리를 설파했다.
단순히 변경지대에서 호기심 어린 이국적 종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세계 종교가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활발한 교역의 명백한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알파벳이나 한자의 전파는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 같다.
베링 해협의 육교가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먼 땅을 걸어서 아메리카까지 넘어가고 이미 신석기 시대때 통나무를 만들어 오세아니아 대륙까지 건너갔을 정도니 과연 인간의 이동 욕구는 놀랍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이 타 문화권에 전파되어 이식되는 힘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사실 이 책이 훌륭한 것도 바로 이 동기를 분석했다는데 있다.
왜 사람들은 낯선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로 상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새로운 문화는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 수용되고 하층민들의 모방 욕구에 따라 널리 전파된다.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이득이 되는 문화를 받아들인다.
당연히 상인들이 전해주는 문화는 선진적인 경우일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자발적인 제휴로써, 선진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이 지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므로 받아들인다.
삼국 시대 때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것 등이 이런 예가 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미국 문화를 모방하는 것, 특히 뉴욕 문화를 동경하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것 같다.
엘리트 계층은 선진 문화를 먼저 수용함으로써 피지배 계층에 대해 우월 의식을 공고히 한다.
둘째 강압적인 복종이 있다.
몽골이나 제국 시대 때의 유럽 등을 들 수 있다.
혹은 이슬람의 성전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종교 박해나 탄압 등이 생기고 저항이 극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존속을 유지시킬 힘을 제공받지 못하는 이상 지배층의 문화를 내면화 시키고 만다.
셋째 소수 집단의 동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전파된 마니교인데, 기독교의 발상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본류와의 교류가 끊기고 특별한 사회적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공동체가 와해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다수파에 섞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유럽 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한국 역시 거대한 중국 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적절한 교류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대외교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절충주의가 필수다.
가끔 개신교에서 가톨릭의 성인 숭배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는데, 2천년에 걸친 기독교의 긴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 피상적인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종교든지 오랜 기간 동안 순수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만약 기독교가 이교도와 타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사실은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 이교도의 축제일이었으므로 기념하지 않겠다는 어느 교파의 주장을 듣고서 문득 드는 생각이, 그렇다면 개천절은 왜 쉬는가?
단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근거로 10월 3일에 나라를 건국했다는 걸 믿냔 말이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토착 신앙과의 절충을 시도했고 성공한 종교는 보다 많은 문화권에 퍼져 나간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제사 등을 문화권의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였으나, 그 후 교황의 잘못된 판단으로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금지하면서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던가?
현재 가톨릭은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념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의 박해 때 제사 문제로 죽어간 그 엄청난 교인들은 얼마나 무가치한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단지 해석의 차이로 말이다.
하여튼 종교의 기본적인 교조나 핵심 가치는 보존되어 하겠으나, 근본주의식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끔을 무섭기까지 한 순혈주의는 오히려 종교의 범위를 축소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판에 직면한 것도 근본주의적인 편협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외에도 권력과 결탁해 마치 교회에 나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는 어처구니 없는 분위기도 한국에서는 한 몫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시 정통 역사학자의 책은 논리정연하고 지나친 비약이 없어서 읽을 때 마음이 참 편하다.
논리의 비약, 무리한 확대 해석이야 말로 아마추어 사학자 혹은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널리 소개가 되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