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마음에 든다.
열 세 가지 사건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술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2008년에 나온 책인데, 마지막 히잡 사건처럼 2004년 당시 결론으로 끝낸 점이나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2006년 현재 상태로 마무리 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사, 특히 정치 부분은 2008년 현재의 상황까지 언급해 줘야 시의성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맨 첫 장의 그리스 민족 기원설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집트인이 바로 조상이라는 주장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들이 많아 꽤 열심히 읽었는데, 저자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저자는 트로이 함락 시기나 그리스인 이주 시기를 십 년의 오차 범위에서 정확히 잡는데, 과연 저자가 근거로 드는 문헌들을 100%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저자의 주장을, 학계에 통용되는 정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자의 책인,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보면 모세의 출애굽은 실제 사건이 아니다.
이집트로의 이민 물결은 특정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됐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고고학적 발굴은 람세스 2세 치하의 대규모 탈출은 불가능 했다는 걸 입증한다.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출애굽기가 쓰여질 당시인 기원전 7세기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므로 당연히 성경에 나온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일 수 없다.
그런데 <서양문화사 깊이 읽기> 의 저자는, 단지 성경에 나온 단 한 구절을 가지고 막연히 람세스 2세 때 출애굽이 일어났다고 전제한 후 논의를 펼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를 지배한 힉소스인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대인과 페니키아인이 되었고 그리스로 가서 미케네인이 됐다는 것이다.
고고학자인 핑컬스타인은 성경의 기록을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지 않은 점을 들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성경을 일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비단 성경 뿐이 아니라 헤로도토스나 기타 전해 내려오는 역사서들의 기록을 전부 인정하는 입장이다.
나로서는 그리스인의 기원이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해, 즉 문헌 증거만 들이대는 것 같아 아직은 의심스러운 입장이다.
저자는 의심하는 쪽을 단순히 동양기원설을 거부하는 서양중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소견으로 치부하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성경 왜곡의 역사> 에서도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는, 당시 날조된 전설로 치부했는데 저자는 같은 힉소스인의 자손이므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앞의 책에서는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마카오베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데 비해, 이 책의 저자는 마카오베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논의에 더 많은 근거가, 특히 고고학적인 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에 실린 히잡 사건은, 뉴스위크 같은 데서 얼핏 본 기억이 난다.
1989년도 사건이라니, 상당히 옛날 얘기인데 2008년 현재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하다.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장소에서 착용할 수 없다는 정교분리원칙에 대하여, 왜 십자가 목걸이는 되고 히잡은 안 되는지 묻는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로, 심지어는 종교적 의미가 퇴색된 악세사리화 돼버린 십자가 목걸이와, 안 쓰면 처벌받는 히잡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좀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이슬람 여학생들이 히잡을 자유의지에 의해 착용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슬람 국가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도 처벌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적, 종교적 비난도 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관용에 대하여> 라는 책을 보면, 이슬람 가정에서 여학생들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고 학교에서는 금지하기 때문에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보기 보다는, 국가과 특정 집단 사이의 힘겨루기로 이해한다.
이슬람 공동체가 강요하는 것을 국가가 금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학생들은 히잡을 벗을 자유, 즉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이나, 어쨌든 특정성에게만 강요되는 종교적 제약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위반했을 경우 강력한 처벌 기제가 존재하는 한) 철폐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스탈린 시대를 분석한 글도 흥미로웠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곧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비슷한 의미라는 관점이 놀랍다.
나는 단순히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정권 유지를 위해, 마치 박정희처럼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미치광이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와 학살 기간이 너무나 컸다.
나치가 유대인을 공직에서 몰아내고 사유재산을 압수함으로써 대신 독일 시민계급은 그 이익을 분배받았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농촌과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뺏은 재산을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계층이 나눠 가졌다.
서구로부터 자본을 빌릴 수 없었던 스탈린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을 집단농장화 시킴으로써 생산 기반을 마련한다.
쫓겨난 부르주아 전문가들 대신, 계급성을 띤 노동자들을 대학에 보내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집단을 양성한다.
숙청된 반동분자들은 당시 미개척지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져 개발 노동력으로 착취당한다.
이것이 소련의 놀라운 산업화 비결이었던 걸 보면 숙청의 범위나 시베리아 수용소 규모가 독재 체제 유지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롤레타리아 전문가들은 소비에트 귀족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등극한다.
능력보다 계급성, 즉 당에 무조건 찬성하는 충성심을 우선시 하는 특권층의 성장은 결국 소련 몰락의 중요 원인이 된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면 결국 몰락하고 만다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민주주의의 동력임을 새삼 확인했다.

서양의 결투 전통이 단순히 낭만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실은 국가 권력을 배제한 사적 해결책이었음도 새롭게 깨달았다.
중세 시대 생겨난 결투는,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양측의 소규모 전쟁을 방불케 했다.
무력에 의한 사적 해결, 이것이 결투의 본모습이다.
절대주의가 들어섬으로써 국가는 공권력으로 귀족 계급의 사적 해결 방법을 억압한다.
오직 국가만이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천명하면서 결투 금지령을 내리고 어길 경우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마녀사냥에서도 보이는데, 중세에는 마을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이단자를 억압했던 것에 비해 절대주의가 들어서면서부터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여져 학살 수준의 끔찍한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결투 전통을 보면 서양의 귀족 계급은 조선의 양반 계층과는 다르게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전사 계급이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본 책이다.
여러 사람이 쓴 글인데도 통일성을 저해하지 않고 비교적 유기적으로 연결된 점이나 저자들의 글솜씨가 고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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