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도에 어디선가 이 책의 소문을 듣고, 필이 확 꽂혀 책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전화했던 적이 있다.
하필이면 읽고 싶은 책이 품절되어 혹시나 서점에 재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몇 군데 알아 봤는데 불행히도 못 찾았다.
결국 도서관에서 찾은 뒤 기대를 잔뜩 품고 책장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지루해서 별 흥미를 못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왜 이 책이 논증적이고 사변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구체적인 사례를 밝혀 부당함을 증명하는 귀납적 방식, 즉 읽기 쉬운 형식이 아니라. 연역적인 방식으로 추론하는 그런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다시 읽어 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너무 평이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얘기는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데, 확실히 과학자들은 직업적으로 책을 쓰고 논증하는 훈련을 하는 인문학자들 보다는 필력이나 깊이 면에서 한 수 아래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지적 사기, 라는 책을 비판하는 리뷰에서 과학자들의 인문학적 깊이가 얕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인문학도들의 편견 내지는 시샘어린 깍아내리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뜻을 조금 알 것 같다.
"만들어진 신" 에서도 전체적인 뜻에는 동의하지만,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추론 과정이 매우 수준높지는 않다.
그냥 평이하게 대중을 설득한다고 해야 할까?
어렵게 글을 쓴다고 훌륭한 것은 아닌데, 확실히 철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인문학적 글쓰기 능력은 차이가 난다.

미국에는 UFO 신봉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하여튼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도 각종 미신과 심령술사들이 판을 치는 것 같다.
기독교적 신정 국가라는 걸 생각해 보면 뜻밖의 일만은 아니긴 하다.
전체 내용의 절반 이상을 UFO 의 존재가 황당무계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 할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UFO 가 그 정도까지 주목받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사실 크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우주선을 보내고 달에 사람을 보내는 나라라 그런지, 외계인에 대한 미신도 큰 모양이다.
하여튼 나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솔직히 지루했다.
평소에 외계인을 봤다는 류의 주장을 접할 때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저 사람들이 봤다는 외계인은 인간과 닮은 걸까?
두 발로 서고 두 손으로 사물을 조작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형태야 말로 지적 생물체에게 가장 적합하단 얘기일까?
칼 세이건은 시원하게 답변한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착각이고 환영이기 때문에 고작 생각해낸 한계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세이건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외계인은 생물학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진부하고 내용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이라는 챕터는 나에게 꽤 큰 의미를 줬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악마와 귀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세이건이 말하는 악마, 즉 demon 은 기독교의 사탄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의 말을 빌리면, 정령이나 악령, 요정, 혹은 사악한 마귀 따위는 없다.
그것들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본다.
사람의 뇌는 형상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하다.
의미없는 여러가지 이미지들 속에서 친숙한 형태를 찾아낸다.
눈은 단지 영상을 받아들일 뿐,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뇌의 후두엽이라는 강의 내용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점을 치고 기도를 하는 것도 다 무의미한 일은 아닐까?
점성술과 굿, 사주 같은 것도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 아닌가?
넓게 확장해 보면, 궁극적으로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체가 없는 추상적 명사일 뿐, 결국은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얘기가 된다.
흔히 몸과 정신은 다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영혼이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 조합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뇌의 작용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말로 실존하는 神 같은 건 없다는 것인가?
뇌과학이 더 발전하면 마음의 실체를 밝혀내지 않을까?
결국은 뇌 역시 인간이라는 육체의 일부듯, 마음이나 정신, 혹은 영혼 역시 뇌가 멈추면 사라지는, 육체의 일부이지 않을까?

인간은 설명 체계를 원한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종교가 자연 현상을 설명해 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초자연적인 존재,  신의 뜻으로 해석했다.
이제 과학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과학이 종교라는 말은 종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숭배의 대상이고, 누구 말마따나 이해가 안 되니까 더욱 열심히 믿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해되지 않은 부분은 미완으로 남겨 두고 알고 있는 것의 범위를 넓혀 간다.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와, 정교한 설명 체계를 원하는 과학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신들린 사람은, 정신분열증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무조건 미친 사람으로 모는 것은 아니다.
통념적인 의미의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혹은 뇌과학적으로 일반인들과 다른 뇌작용이 있을 것 같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전체 인구의 1% 라는 걸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 만한 얘기다.
뇌과학이 좀 더 진보한다면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던 정신적인 영역, 이를테면 귀신들린 사람, 방언을 하는 사람, 환영을 본 사람,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 등등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환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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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ngkiller 2007-12-2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무지하게 두껍고 빡샌 책이었던 기억이...ㅎㅎ 샀다가 다른 책으로 바꿔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

prongkiller 2007-12-25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린님 페이지를 한번 쭈~욱 하고 훑어봤습니다. 이정도면 뭐 '문사철 600' 정도야 대학시절에 가뿐하게 끝내셨겠네요. 부럽습니다.
철학 쪽만 보강하신다면 정말 무시무시한 내공이 되겠네요.(물론 지금까지 읽으신 철학 서적도 충분히 많으시지만^^)
주로 네이버 블로그에서 활동하느라 알라딘엔 무척 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여기 한번 방문하시길 빌께요. http://blog.naver.com/ivorymind
그럼 즐거운 크리스마스 맞으세요 마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