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술관에 간 화학자 - 과학의 프리즘으로 미술을 보다
전창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독특한 제목만큼 기획도 신선했다.
화학자의 눈으로 본 명화 해설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책 자체는 썩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저자의 글솜씨가 안정적이고 도판이 훌륭해 읽어 볼 만 하다.
요즘 나오는 미술책들은 생생한 화보집처럼 도판을 싣기 때문에 저자의 문장력이 왠만하기만 하면 일정 수준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문국현씨가 쓴 법의학자가 본 명화라는 책 보다는 훨씬 재밌고 설명도 자세하다.
아마도 저자가 프랑스 있을 당시 미술품에 대한 원서를 많이 읽었던 것 같다.
풀이하는 수준이 전문가는 못되더라도 아마추어 이상은 된다.
제일 새로웠던 발견은, 물감의 발전이 그림에 가지고 온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물감은 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미술과 화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상파들이 풍경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던 배경도 다 튜브 물감이 나오면서부터라고 하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펼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안료의 비약적인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
유화 역시 마찬가지다.
플랑드르에서 유화를 처음으로 발전시킨 얀 반 에이크로 인해 르네상스 그림은 생생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
아르놀피니의 결혼. 이라는 그림을 보면 그 고운 녹색 드레스의 색감이 눈부시다.
또 안료를 석회에 개서 그리는 프레스코화 보다 훨씬 더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니 르네상스 시대의 사진 같은 훌륭한 묘사는 유화의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달걀 노른자를 바르는 템페라화는 광택이 나는 유화에 비해 보존 상태가 나쁘다고 한다.
특히 수성 물감을 쓰는 템페라화와 기름을 쓰는 유화를 섞어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은 현재 거의 색깔을 잃어 버릴 정도로 훼손이 심해서 최근 복구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수백년 동안 원형 상태를 잃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것도 미술사 발전에 화학이 기여한 부분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화를 만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저자 역시 화학자라 그런지 라부아지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낸다.
교과서에 보던 위인을 그림책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새로웠다.
약간의 미화가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부부는 매우 세련되고 점잖은 귀족 같이 묘사됐다.
실제로는 세금 징수원이었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파에게 참수됐다고 한다.
역시 같은 세금 징수원이었던 장인도 함께 참수됐다.
참으로 끔찍한 시대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라부아지에를 고발한 마라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욕조에서 온건파 아가씨의 칼에 찔려 죽은 마라의 최후는, 역시 같은 급진파였던 다비드에 의해 그림으로 생생하게 묘사됐다.
다비드의 정치적 행각은 EBS 프로그램의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혁명 때는 로베스피에로를 지지하면서 온갖 권력을 휘둘르더니, 그가 참수되자 한낱 그림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태도를 바꾼 다비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는 나폴레옹 대관식 등을 그리면서 어처구니 없게 왕정에 충성을 맹세하다가 그마저 귀양가고 나자 결국 벨기에에 망명해 평생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 프로그램의 평론가도 그렇고 이 책의 저자도 다비드를 매우 정치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는데, 인물 평가가 어떻든 간에 다비드의 그림은 정말 위대하다.
그 크기 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고 주제도 역사화가 많아 웅장한 맛이 있다.
특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나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같은 그림은, 과연 신고전주의의 기수답다는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언젠가 책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부그르의 그림을 만난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부그르는 인상파가 세력을 얻기 전, 국전파의 마지막 주자라 할 수 있다.
달력 같은 정형화된 그림에 나올 법한 그의 작품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물론 고흐나 렘브란트 등이 주는 개성은 많이 떨어진다.
뭐랄까, 너무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하여튼 마치 천상의 여인을 그리듯 어쩌면 인간을 저렇게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나 싶을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훌륭한 그림이 많다.
인상파가 대세를 이룬 후 몇 십년 간 완전히 잊혀졌다고 하나, 어떤 평론가에 의해 발견된 후 현재는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어쨌든 개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드로잉 솜씨나 색감은 훌륭한 화가다.
벨라스케스는 인상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왜 그 화가가 위대한가 했더니, 이미 17세기에 근대적인 감각을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시녀들, 이야 워낙 많이 인용돼서 오히려 식상하지만, 그 외의 다른 그림들을 봐도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에 중점을 둔다거나, 평면적인 강렬한 묘사를 한다던가, 현실에 주제를 찾는다거나 하는 등 시대에 걸맞지 않게 근대적인 기법을 스스로의 천재성에 기대어 많이 선보인다.
그러고 보면 벨라스케스 그림은 세련됐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에 따르면, 멀리서 보면 분명하게 형채를 갖추었는데 가까이 들여다 보면 쓱싹쓱싹 선으로 대충 버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밀하게 선 하나하나를 그린 게 아니라 대충 선을 뭉개면서도 완벽하게 하나의 형체를 구현했다는 점이 화가의 위대함을 설명해 준다.
내가 좋아하는 마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화가인데, 마네 역시 벨라스케스를 몹시 존경해서 많은 모사를 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화가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이라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사물을 묘사했는지 또 그들이 입은 비단옷은 마치 그 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특히 가운데 해골을 교묘하게 배치함으로써 MOMENTO MORI 라는 경구를 실감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가히 당대를 대표할 만한 화가답다.
특히 이 사람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는 그 고귀한 인격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너무 마음에 든다.
대체 훌륭한 화가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전체적으로 도판도 훌륭하고 저자의 글솜씨도 어지간 하고, 시도도 새롭고, 그래서 평균 이상은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