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묘지명 - 삶과 죽음의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지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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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묘지가 뭔지도 모르고 읽은 책이다.

무덤을 묘지라고 하는 줄 알았다.

땅 地 가 아니라 기록할 誌 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부모의 묘에 묘주가 누구인지 밝히는 묘지명을 부장하는 것이 효의 일환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 신선하다.

이장을 하지 않는 이상 선조의 무덤을 파헤치지는 않으니 아직도 발굴될 묘지명들이 땅 속에 많이 묻혀 있을 것 같아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알려지길 기대 본다.

묘지명을 묻는 가장 큰 이유는 세월이 흘러 누구의 묘인지 알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였다고 한다.

비석을 세워도 분실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무덤 안에 돌이나 도자기에 묘주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제일 유명한 경우가 바로 무녕왕릉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능 중에서 유일하게 묘주를 알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묘지명 덕분이었다.

고려 시대는 상감청자 등 도자기 문화가 꽃을 피웠는데도 돌에 새긴 묘지석만 있었고 조선 후기로 오면서 도자기를 묘지로 널리 쓰이게 됐다는 사실도 신선하다.

돌에 새기는 것보다는 도자기에 새기는 쪽이 훨씬 노력이 덜 들어갔을 것 같긴 하다.


<오류>

132p

문조는 헌종의 세자, 고종의 양부이다.

-> 문조는 헌종의 아버지이다.

152p

능양군 이균을 선조 임금으로 세우는 데

-> 선조가 아니라 인조이다.

219p

영암 보림사의 탑을 중수하기 위하여

-> 영암이 아니라 장흥 보림사이다.

229p

정효공주(문왕 제2녀) 묘지명이 있다.

-> 문왕의 4녀이다.

246p

김도제는 김우명의 삼남인 석연의 아들이었으나 우명의 장손이자 봉사손인 만주에게 입후되었다. 한편 석연의 양자 도영은 본생가에서 도제의 아우였다.

-> 김만주는 김우명의 장손이 아니라 장자이다. 또 김석연의 아들 김도영은 형인 김석익에게 양자로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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