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간만에 편하게 읽은 책이다
당직 선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격려해 가면서 읽은 책이다
내용이 평이해서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그 전 날, "서양전쟁고대사 박물관" 이라는 방대한 책을 정말 힘겹게 읽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늘 책은 술술 넘어갔다

박상익이라는 사람, 생각보다 아주 전문적이거나 아주 권위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교수라는 직함 때문에 그런지 꽤나 학자다울 것이라는 이미지를 받았는데,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겼다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저자의 글솜씨, 혹은 문체에 대한 평가인데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는 후하게 점수를 주고 싶지만, 아래 리뷰에도 나온 바대로 너무 흥분만 하고 말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깊이 면에서 보면 가벼운 에세이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가 번역한 책 두 권, "소크라테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와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를 재밌게 읽은 덕에, 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덩달아 좋았었다
특히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는 앞의 책에 비해 분량이 2배나 되는데 저자가 각주를 너무 성실하게 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지루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하여튼 번역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높히 사고 싶다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내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원서나 논문을 혼자 읽는 것은 그런대로 하겠는데, 남에게 번역해서 주려면 머리에서 쥐가 날 만큼 힘들다
매끄러운 문장이 안 만들어지고, 왠지 원글의 의도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중언부언 하게 된다
전혜린도 독일어 번역의 고달픔을 수필집에서 토로하지 않았던가!
문학책의 번역이라면 특히나 번역가 자신의 문장력이 많이 요구된다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를 원서와 번역본을 비교해 가면서 읽은 적이 있다
비교적 직역을 하면서도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매끄러운 문장으로 바꾸어 놓은 저자의 번역 실력에 탄복했다
그러고 보면 좋은 번역가는 좋은 작가이기도 한 것 같다

책벌레이기도 한 저자의 수필집이다 보니, 비단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여기서 소개된 "지적 생활의 방법" 은 나 역시 감탄하면서 읽은 책이라 더욱 반가웠다
개인 도서관을 만들라는 저자의 충고가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던지!!
단순히 책만 많아서는 안 되고, 책을 고르는 안목과 함께 공간 확보라는 중요한 경제적 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니다
"지적 생활의 방법"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아예 집 한 채를 더 사서 그 곳을 도서관 겸 집필실로 꾸몄다
아파트 위 아래 층을 동시에 산 것이다
정말 최고의 방법이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과 (다른 물질적인 부분을 포기해야 하니까) 감당할 능력이 필요하므로 함부로 따라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저자의 분개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고종석이 이야기한 명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 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복거일처럼 도발적으로 영어 공용화론을 부르짖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 대의에는 충분히 공감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글이나 한국어를 사랑하지 않는가?
"슬픈 외국어" 에서 하루키가 토로했던 바대로 모국어는 곧 나의 속살, 나를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진정한 이중 국어자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게 된다면, 즉 생활어가 된다면 저자의 걱정과는 달리 곧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민가면 아주 상노인이 아닌 이상 그럭저럭 영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생활 속에서 쓰지 않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이를테면 공부할 때처럼, 그 순간에만 쓰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 직업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영어 사용이 어렵지 않다
왜냐면 일상적으로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어의 장벽을 없앨 수만 있다면 인간이 사고하고 경험할 수 있는 폭은 무한정 넓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 시민권에 대한 분개도 그렇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인이 자기가 태어난 곳과는 상관없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데 왜 그게 맞아 죽을 것 같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전쟁 나면 나라 안 지키고 다 도망갈 놈들이라고 하는데, 전쟁 터져서 안 도망갈 사람이 어딨나?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전쟁터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게 아름다운 나라, 살기 좋은 나라로 가꾸는데 힘을 쓸 일이지, 왜 비난하는데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마치 군대 자체의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점을 찾는 게 아니라, 여자도 군대 가라, 혹은 연예인도 군대 보내라 이런 식으로 대중적인 선동에만 앞장서는 것처럼 말이다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롭게 느꼈다는 점에서도 소득이 크다
저자의 울분처럼 인류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사상가들의 선집이 제대로 번역된 게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일본의 번역 문화는 놀랍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면 알수록 감탄할 때가 많은데, 번역 역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중요한 힘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저자의 주장처럼 번역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한다면 인문학의 폭이 보다 넓어지지 않을까?
언어의 장벽이 없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은 번역 활동이 보다 활발해져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지성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
영어나 기타 외국어에 약한 사람들로서는 번역이 유일한 해방구라는 얘기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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