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
김선주 지음, 김범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정말 간만에 너무 재밌는 역사책을 만났다.

역사서도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책.

3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도 마치 소설을 읽듯 흥미로워 한번에 쭉 읽었다.

역시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이다.

저자의 이력이 독특하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영어로 쓴 논문을 한국인 학자가 번역한 독특한 책인데, 그래서인지 약간의 번역투 문장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독성이 좋고 무엇보다 사건을 보는 시각이 외부자라서 그런지 훨씬 날카롭고 비판적이다.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것은 연구자의 이런 실제적인 비판을 듣기 위함이지 단지 역사적 사실 나열을 읽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또 가끔 국내 필자책에서 보는 당위적이거나 명분론, 도덕적 포폄의 서술이 없어 너무 재밌다.

무엇보다 인용한 자료들이 아주 풍부해 저자의 주장에 신뢰가 가고 19세기 당시 조선의 지방 사회와 중앙의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저자는 홍경래의 난이 지배 계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층의 계급 투쟁이 아니라, 중앙에서 소외받던 지역 지배층이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적인 계급투쟁론, 혹은 농민운동 같은 시각은 서구에서도 어쩐지 철지난 이론처럼 취급하는 느낌이다.

역사는 도덕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 사건이 당시 사회에 미친 "실제적인" 진짜 이유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억압받던 민중의 힘이 모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차별받아 온 평안도 지역의 지배층들이 차별에 울분을 느끼고 있던 차에 정감록 같은 유교적 왕조 교체설과 풍수지리, 도참설 등에 힘입어 반란을 꾀한 것으로 본다.

간단히 말해 수탈받는 민중은 반란을 조직할 정치적 의식이나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항상 의아했던 것이, 왜 조선 정부는 관북 사람들을 차별하고 중앙 정계에 받아주지 않았냐는 점이었다.

조선를 세운 이가 다른 지역도 아닌 함경도 출신인데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비단 관북 사람들만 소외된 것이 아니라 16세기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울 이외의 모든 지방 사대부들이 거의 중앙으로부터 소외됐음을 지적한다.

또 평안도 지역은 국경에 가까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진족과의 투쟁 속에서 영토를 확보해 갔기 때문에 변방이라는 지역적 차별이 존재해 왔다.

기존의 양반층이 세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이주시키고 유배 등 형벌로써 어쩔 수 없이 정착하게 된 경우가 많아 삼남 지방에 비해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6세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자 지역 산림들의 정치적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유교적 풍습 자체가 늦게 정착되는 바람에 중앙에 진출한 북부인들을 끌어 줄 세력이 없었다.

자연히 이들의 고위직 진출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상업이나 청과의 무역 등을 통해 자산이 증가하면서 북부 양반들의 과거 급제율은 올라가고 관직을 얻지 못하자 불만이 쌓여 갔다.

저자는 지역 지배층의 이러한 울분을 반란의 원동력이라 생각한 반면, 당시 조전 정부에서는 단순히 삼남의 민란처럼 탐관오리의 횡포가 원인이라 봤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북부에 대한 차별은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 정부의 군사력도 매우 미약하여 겨우 수백 명의 반란군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5개월을 끌었고 결국은 외세에 의해 망하게 됐음을 지적한다.

어찌 됐든 조선 정부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그 후로도 안정적으로 이 지역을 통제했던 것을 보면, 상당히 안정된 통치체제였음은 분명하다.


<오류>

169p

한국사에서 예언적 신앙을 이용한 것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7세기 후반 정여립의 음모였다.

-> 정여립의 난은 1589년에 일어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