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서원의 위상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7
차장섭 외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 새물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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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일기들을 분석한 이 시리즈, 아주 좋다.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분석한 책이라,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것 같다.

제목은 좀 지루해 보이지만, 궁금해 하는 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서원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재지사족들에게 서원이 어떤 위치였는지를 보여준다.

후기로 갈수록 노론 일당 독재에 경화벌열, 일부 가문에게만 관직이 허용되면서 상대적으로 영남 남인들은 지방에서 세력 확보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주자학이 점차 강화되면서 많은 제자들을 키운 퇴계의 영향력은 높아갔는데 서원이 바로 영향력의 중심이었다.

퇴계는 수령권과의 다툼을 극도로 경계하며 가장 먼저 세금을 바치고 수령의 포폄도 피할 정도였으나 도산서원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재지사족들은 지방 수령과 대립하게 된다.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차별적 질서가 당연했고 권력에서 200년 동안 소외되어 있던 조선 후기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도산서원의 원장이었던 이황의 후손 이유도가 소송 중에 감사에게 불경한 언사를 했다고 갇힌 후 심문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금 생각하면 옥에 갇히는 것 자체가 고령의 노인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을텐데 형장까지 맞다 보니 사망해 버렸던 것 같다.

국가에서 재지사족들, 특히 영남 남인들을 엄격하게 제압하려 했었음을 알 수 있고, 이황의 처신이 현명했던 셈이다.

서원의 위상이 높아지자 19세기에는 이황의 집안인 진성 이씨 가문에서 원장을 독점하다 보니 지방 문화의 거점이 한 가문의 기구로 전락해 공적 기능과 위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외부에서 원장을 초빙하기도 했으나 실제적인 권한은 진성 이씨 집안에서 쥐고 있었다고 한다.

영남 만인소 등을 통해 비록 권력에서 소외되었으나 중앙 정부와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소개된다.

맨 마지막 챕터에서 여러 사대부들이 당색을 초월해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지은 제영시들을 소개하면서 이곳이 당대의 문화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양화가 아닌, 유교식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이런 수많은 제영시들도 문화 컨텐츠가 될 수 있겠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과연 현대인들이 즐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류>

113p

안동부사 송상인은 부임 초부터 '가혹하고 사나운 정치'를 선보였던 원칙주의자였는데, 향촌에서 행세하던 사족과 양반 중 그에게 매를 맞은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유도가 문초받는 과정에서 수령과 감사를 모욕했고, 갇힌 지 2달 만에 장형을 받아 사망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 같은 책 26페이지에 따르면 이유도는 안동부사 송상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사인 원탁에 의해 체포됐고, 감사가 직접 안동에 와서 형신을 가하다가 구금된지 15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전에 읽었던 김령의 계암일록에서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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