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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 ㅣ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4
김주원 지음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음운학은 어려운 것 같다.
다른 글자도 아니고 한글인데도 쉽게 와 닿지가 않는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 중 하나로 애민정신을 들고 있는데, 서양 학자의 평가처럼 문맹을 혁파하려는 근대인적 사고방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리학적 인간을 교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은 백성이 글자를 알면 오히려 교활해지고 법을 이용하려 들 것이라는 당시 높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교화시키면 좋은 심성을 가진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의도는 매우 획기적이고 앞서가는 사고이긴 하다.
또 단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쉽게 표음문자를 만들 수 없는 일이니 과연 놀라운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요즘 쓰는 용어인 근대인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세종은 백성을 교화시켜 성리학적인 인간을 만들고, 또 중국과의 사대 외교를 잘 시행하기 위한 두번째 목적도 한글 창제의 큰 동기였을 것이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를 읽을 때, 중국어를 정확히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갔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과연 외교 문서를 격식에 맞게 정확히 작성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매우 중요했던 듯하다.
요즘 생각하는 외교 의전 문제 정도가 아니라 사대는 건국된지 얼마 안 된 조선의 존망이 달린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최만리 등도 이런 걱정 때문에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점도 컸으리라고, 저자는 공정하게 평가해 준다.
반대하는 신하들은 同文同軌, 즉 중국과 같은 글과 법도를 쓰는 한 문화권이기 때문에 중화 문명의 밖에 있는 오랑캐처럼 따로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성리학과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은 신생국가 조선의 엘리트층으로서는 주장할 만한 논리였다.
이런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 창제를 강행했다는 점도 세종 친제설의 간접 증거이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한글 창제를 위해 요동에 여러 차례 갔다는 것도 한글 창제 이후의 일로, 한자음의 정확한 정비를 위함이었다.
한글 창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나이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는 점도 협찬설 보다는 친제설 쪽에 무게가 실린다.
과연 세종은 대단한 언어학자였던 것 같다.
파스파 문자와의 유사성 등이 지적되는데, 기본적으로 한글은 네모난 형상을 지닌 문자이므로 자형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지만 발성기관을 본땄다는 점에서 창제 원리가 다르고, 중성의 모음표기 아이디어가 비슷할 수 있는데 당시 존재하던 모든 문자에 대한 연구 성과가 더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한글의 위대함을 역설하는데 그치지 않고 창제 당시의 상황과 다른 여러 표음문자와의 관계 등을 함께 설명해 줘서 새롭게 한글의 창제 과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동물 소리도 다 표기할 수 있다는 정인지의 서문에 대해, 이는 모든 소리를 다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라는 뜻이 아니라, 표의문자와는 다르게 아무 뜻이 없는 소리도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표음문자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자연의 소리는 '음향'이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비슷하게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니 특별히 어떤 문자만 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류>
196p
세조가 북경에 사은사로 가면서 동생인 임응대군에게 보낸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임응대군이 아니라 임영대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