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새로 읽기
주보돈 지음 / 주류성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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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가야전을 인상깊게 보고 좀더 알고 싶어 선택한 책이다.

300 페이지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기존의 알려진 내용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어 다른 책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1) 가라는 대체적으로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는 말이고 대가야가 국가로서의 위상을 거의 정립했던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가야전 도록에서도 명시됐었다.

임나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야 연맹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남정 이후 쇠퇴했고 낙동강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내륙의 대가야가 철 생산을 매개하면서 왕국 수준으로 커 갔다고 한다.

보통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온 가라를 금관가야로 보지만, 저자는 대가야로 생각한다.

금관가야가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몰락하여 고령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가야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5세부터 부흥했다는 것이다.

남제에 사신을 보낸 가라국왕 하지도 저자는 대가야로 추측한다.

내륙에 있던 대가야는 섬진강을 이용하고 백제와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

저자는 그 밑에 있는 함안의 아라가야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기술한다.

워낙 사료가 적어 대부분 추정치이긴 하나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을 중심으로, 안라가야는 신라의 공격에 대항하여 안라회의 등을 주최했고 대가야와 함께 일정 부분 세력을 유지했다고 본다.


2) 저자는 369년 근초고왕의 영산강 정복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나온 기사에 120년을 더하면 대략 시기가 맞다는 것이다.

과연 근초고왕이 영산강까지 남정하여 마한을 복속시켰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분분한 것으로 안다.

지난번 여러 학자들의 논쟁을 읽어보면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복속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므로 거의 성왕 시기까지 백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저자는 마한이 워낙 백제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쳐져 고구려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굳이 마한을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간접 지배 방식으로 내버려 뒀다는데, 상식적으로나 고고학적 관점에서나 공감이 안 되고 국력의 한계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왜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 마한을 점령한 것으로 나오는데 저자는 근초고왕의 지휘 아래 목라근자가 원정하여, 侯 개념으로 봉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개로왕이 전사한 후 수도를 옮기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백제는 국력을 키워 영산강 유역을 정복해 갔지만 가장 큰 목표를 한강 유역 탈환이었으므로 신라와 동맹하고 가야와 왜까지 끌어들여 고구려에 맞섰으나 신라의 배신과 관산성 전투 패배로 성왕이 허무하게 죽고 난 후 결국은 망하고 만다.

더불어 백제에 의존하고 있던 가야 역시 신라에 망하고 만다.

제일 먼저 항복한 금관가야는 진골 귀족으로 우대했으나 마지막까지 버틴 대가야는 피지배층으로 복속시켰다.


가야는 삼국처럼 확고한 중앙집권적 왕조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사라져 버려 늘 실체가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윤곽이 조금씩 잡히는 느낌이다.

가야라는 하나의 큰 나라나 연맹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낙동강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작은 소국들이 서로 연합한 게 바로 가야가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나 대가야, 아라가야 등이 비교적 규모가 커서 역사에 흔적을 남겼던 것 같다.

마한 54개국처럼 가야도 여러 소국들의 집합체이고 독자성을 가졌으나, 신라가 사로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커가면서 점차 잠식되어 사라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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