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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빈궁일기 - 현전 유일의 궁궐 여성처소 일지 ㅣ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 자료총서 27
정병설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1월
평점 :
제목은 <혜빈궁일기>이지만 부제처럼 요즘 개념의 일기가 아니라 매일 일과를 기록한 일지이다.
혜빈궁일기를 소재로 글을 쓴 게 아니라 일기를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라 나같은 일반 독자들이 교양서 수준으로 읽기에는 다소 지루하고 어렵다.
사도세자 사망 이후 세손을 시아버지 계신 경희궁으로 보내고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혜경궁은 따로 살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친아들, 그것도 40이 넘어서 낳은 귀한 아들에다가 대리청정을 10년 넘게 한 세자를 죽인 시아버지니 며느리 혜경궁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더군다나 시할아버지인 숙종 역시 세자를 낳은 장희빈을 죽였고, 그 앞의 인조는 며느리 강빈과 친정을 몰살시키지 않았던가.
왕가의 권력이란 일반 가정의 가족애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모양이다.
공식 일지이다 보니 한중록처럼 개인적인 소회가 없어 아쉽지만 저자의 해설을 읽으면서 당시 궁중의 풍속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다.
상궁과 내인이 40여 명에 이르고, 그 시중을 드는 관비가 또 40여 인, 남자 내관이 10여 명, 액정서 별감들이 10여 명, 거기에다가 이들을 호위하는 별군직까지 하면 100명이 넘는 인원들이 이 혜빈궁에 속해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여인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전근대 사회의 왕이란 지고지순의 존재였던 것 같다.
왕비의 지위에 오르지도 못한 혜빈이 이런 규모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왕위를 이을 세자나 임금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까 싶다.
일지인 만큼 매일 기록이 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대전과 중궁전에 문안 든 내용만 나온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희궁에 있는 임금 내외에게 내관을 보내 문안을 여쭌다.
재밌는 게 이렇게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의례라면 순번을 정해 놓고 가면 될텐데, 오늘은 누구를 보내냐고 묻고 누가 가라 하면 갔다 왔다고 보고하는 식이다.
내관은 8~10명 사이로 위계가 정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위치의 내관을 보내는지 물어보고 지시하는 게 신기하다.
말을 내달라고 하는 것도 특별한 명령이 있어야 가능했던 모양이다.
임금이 좀 멀리 행차할 때는 따라가서 문안 드릴 수 있게 말을 내달라고 부탁하는데, 신기한 것은 내관, 별감, 상궁, 내인은 물론 의녀까지도 말을 타서 서른 필이 넘는 마패가 발행된다.
궁에서 지존을 시중드는 이들도 말을 타고 갈 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던 모양이다.
왕실 여인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인지 모든 문안과 행사는 전부 내관들이 대행한다.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은 혜경궁의 시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망시 시마복, 즉 혈연관계가 가장 약한 3개월 복상 밖에 입지 않아 안타깝다.
왕의 후궁이라는 위치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 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정식 왕비의 자리에 오른 장희빈이 새삼 대단하게 보인다.
선희궁 조카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해 인사를 오고 훗날 황해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절도사라고 하면 정3품 당상관인데 선희궁은 양반이 아닌 궁녀 출신으로 알고 있다.
양반이 아니라 해도 무과를 통해서는 당상관에도 오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자의 외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특별한 신분 상승이었는지 궁금하다.
<오류>
17p
또한 혜빈궁과 동년생인 작은아버지 홍용한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도 인사를 왔다.
176p
홍용한은 혜빈궁의 작은아버지이지만 나이는 헤빈궁과 같아서 가까이 지냈다.
-> 혜빈궁은 1735년생이고, 홍용한은 1734년생으로 나온다.
211p
영조가 인현왕후의 옛집을 방문하여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동네의 이름을 추모동이라고 고쳤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초비다.
-> 숙종의 초비는 인경왕후이고, 인현왕후는 계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