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 기억의 역사에서 기록의 역사까지 조선 왕비 이야기
김진섭 지음 / 지성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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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워낙 관심있어 하는 분야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전문적인 학자의 책이 아닌 이상 뻔한 에피소드 나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었고 사료를 바탕으로 저자의 역사관이 드러나 도움이 됐다.

조선 왕비들은 워낙 사료가 부족해 새롭게 나올 부분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아쉽다.

대신 수렴청정 등을 행했던 시기에 당시 정치적 상황과 같이 설명해 줘서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여자는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어릴 때 왕실 보호를 위해 대비에게 정치를 맡겼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대비 입장에서는 (정희왕후의 경우는 한문도 몰랐을 정도다) 친족을 국정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금기가 많아져 왕비 뿐만 아니라 왕실 자체의 생산력이 저하되어 어린 왕이 등극하고 급기야는 민간에서 오래 살아 군호조차 없었던 강화도령까지 임금으로 세울 정도였던 당시 사회의 경직성이 안타깝다.

그런 과정에서 대비와 그 친족이 전면에 나설 여건이 만들어지고 결국은 나라가 한 가문의 독주로 점철되어 근대사회 진입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싶다. 

대비들 입장에서는 왕실의 후계가 끊어지지 않고 500년의 긴 시간 동안 이씨 왕조를 유지했으니 종묘사직은 지켰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는 경쟁력을 얻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교육이나 정치적 훈련을 받지 못한 왕실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과업이었던 것 같다.

단순히 도덕적 포폄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적 의의와 한계 등에 대해 평가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영조가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던 부분을 읽으면서 왕도 음모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뭔 일이 안 되려고 병을 앓고 있던 경종에게 영조 딴에는 잘해 보려고 감이나 게장 등을 올렸을텐데 하필 그거 먹은 후로 사망했다고 하니 영조로서는 펄쩍 뛰고 억울할 일일 거다.

안 그래도 무수리 출신 어머니 때문에 신하들에게 권위가 안 서는 마당에 평생 동안 독살설 의혹에 시달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런 야사를 마치 가능성 있다는 식으로 책에 기술하는 사람도 있으니 지하에서도 억울할 것 같다.

왕도 이렇게 음모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당시 무고 등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새삼 안타깝다.


<오류>

67p

원경왕후의 집안은 민지의 손자 민선의 딸이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과 혼인하여 겹사돈을 맺을 정도로 이성계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 민지의 손자 민선과 민제는 촌수(13촌)가 한참 멀어 한 가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겹사돈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민제의 7대조 민영모 이후로 갈라졌다.

457p

인현왕후의 동생 민진원이 ~

-> 민진원은 인현왕후의 둘째 오빠이다.

581p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에 나서게 된다. 4년 뒤, 섭정을 거둔다는 하교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적극적으로 국정을 주도한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했다.

585p

고종은 즉위한 뒤 신정왕후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한 이후로도 대원군이 정국을 장악하여 철권정치를 행하면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고종은 20대 중반의 성년이 되어 있었고

596p

20대 중반의 청년 고종이 친히 정사를 돌보겠다는데 이를 반박할 명분이 약했던 대원군은 결국 집권 10년 만에 권력에서 물러나~

-> 고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1863년이고, 친정을 시작한 시기는 1873년이다.

신정왕후가 1866년에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하교를 내렸고 대원군이 권력을 휘두르다가 1873년에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므로 이 때 나이가 22세이다. 즉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을 포함하여 대원군이 10년 집권한 것이지, 수렴청정 4년 후 다시 대원군이 10년 집권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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