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 화가들이 기록한 6.25
정준모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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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책일까 봐 약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쓰여져 술술 넘기면서 금방 읽어버렸다.

6.25 당시 전쟁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찌 보면 평범한 민간인들이었던 화가들이 양쪽 정부에 동원되어 숙청당하고 고통을 겪었던 사정을 이야기한 책이다.

저자의 주관이나 평가가 많이 들어가지 않고 당시 화가들의 증언과 신문 기사 등을 주로 인용하여 한 편의 다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난을 간 화가들이 부산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또 거기서도 노숙을 하고 행상을 하면서도 변변한 화구 하나 없이 포기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가.

이 분들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지배인으로써 오랫동안 고통받다가 겨우 독립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전쟁의 고통 속으로 빠진 셈이니 가장 불행한 세대가 아닐 수 없다.

외적의 침략도 아닌 내전으로 말이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정권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원흉에게, 친일파를 처단하고 민족 주체성을 살렸다는 오늘날의 일부 평가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의 슬픔도 화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중섭만 불우한 줄 알았더니 다들 힘든 세월을 보냈었던 모양이다.

근대화가들에 대한 전시회 도록들을 여러 번 봤더니 익숙한 이름들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47p

부산 화가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서울 화가들이 내려와 쉬지 않고 그룹전이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설쳐대는 모양으로 비춰졌던 것도 있었고 미국대사관이 서울에서 온 작가들의 그림을 사준 것이 심기를 상하게 한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김환기는 여러 모임에 주동이 되었기 때문에 가장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228p

김용환은 6.25 전쟁이 시작된 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인민군에 의해 삐라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던 이력 때문에 9.28 수복 당시 다시 국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출중한 만화실력으로 인해 육군본부에 배속되어 대북 선전만화와 삐라의 원화를 그리는 일을 맡게 되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다 뿐이겠소? 뭐든지 시키는 대로 그릴 테니 종이와 붓만 가져다 주시오. 내 앞에는 즉시 종이와 붓과 먹물이 준비되었고, 나는 곧 붓을 들었다. 만화 아이디어 걱정은 필요없었다. 지금까지 괴뢰군 사령부에서 그렸던 그림을 반대로만 즉, 이승만이 김일성을 압록강 저쪽으로 몰아내는 그림으로 바꿔 그리면 되는 것이었다."

263p

당시 정훈 부장 이선근은 종군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이념 창조자라는 입장에서 파악했다. 문화인들의 작품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과 전의를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종문의 경우 현대전에서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전전을 문화적 기술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하나의 전투수단으로 보았다. 곽종원은 '행동적 휴머니즘'을 내세우면서 경험과 그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창작방법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소설가 김동리는 전쟁과 문학이 결부되면 전쟁은 문학의 한 소재에 불과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문학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기 또는 도구로서의 의의를 가진다고 정리한다. 나아가 전쟁에서는 이념이 매우 중대한 무기이며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이 정신적 무기로 간주된다고 하였다.

(문학이나 그림이 전쟁의 한 도구가 된다면 예술로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공산주의 체제에서 예술이 몰락한 것도 이념의 수단으로 이용됐기 때문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예술지상주의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247p

이 중 무엇보다도 큰 종군화가단의 이점은 어려운 시기에 생계유지의 수단과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전망 확보였다. 특히 월남한 예술가들의 경우 소위 '빨갱이' 또는 '간첩'으로 몰리면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생면부지의 땅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종군화가단증뿐이었다.

 일부 젊은 작가들의 경우 군복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부수적 수입을 얻을 수 있고 때로는 권력까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너나없이 종군화가단의 문을 두드렸다.

299p

그녀는 이 책에서 "한국에서 우리는 대비하지 못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패배의 대가보다 훨씬 쌀 것이다"라는 명문으로 많은 이들에게 승리를 독려했고 맥아더 장군과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미군이 파견될 것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해서 특종을 만들어냈다.

305p

2차 서울탈환은 희생을 최소화하며서 비교적 순조롭게 성공했는데 이것은 당시 중공군이 병참공급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정도의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데 이유가 있다. 6.25 전쟁에서 예상보다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중공군은 3월 11일 이미 서울에서 자진철수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으며 비교적 손쉬울 것이라 보았던 용문산지구 북한강 전투까지 육군 6사단에 대패한 것을 계기로 휴전회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 승리로 인해 국군은 약체라는 이미지가 상쇄되었고 UN군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계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중부전선을 동서로 나누어 공격과 방어를 하고자 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전술을 차단하면서 서울에 미칠 군사적 위협을 사전에 제거했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이 승리가 중공군과 인민군 측이 우리 쪽에 휴전회담을 제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317p

한편으로는 작품을 제작한 김환기와 남관, 김병기 모두 이후 미국이나 프랑스로 떠난 것을 보면 이들이 작품의 해외전시를 빌미로 전쟁 중에 해외로 나갈 기회를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닌가 추측도 해본다.

343p

"불란서에서의 그것과 일본에서 유행된 그것은 퍽 장식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그런 장식적인 것은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체험한 그것을 화면에 나타내되 휴머니즘을 무시하지 않고 사실적인 것 또한 무시하지 않은 추상이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동양화란 원래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암시적이지요. 말하자면 공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서양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공간에서 발달된 것입니다."

 한국 화단에서 가장 긴요한 문제는 새로운 미의 창조이며 새로운 미술이 추상임을 상정하였고 김병기는 '추상회화의 문제'를 통해 현대미술의 양식은 추상적 경향이라고 정의한 후 "원래 회화는 하나의 추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비형상 회화는 실제 세계와는 하등의 관련을 맺지 않는 것이며, 완전히 관념세계에의 탐구이며 형이하의 현상세계와 절연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352p

남북한의 정치가들에게 6.25 전쟁은 '전쟁'이라는 공포를 통해 적절하게 국민들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남북한이 공히 그렇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일부는 이런 상황이 남한에서만 존재했던 정치 상황인양 몰아가고 비판한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자면 남과 북이 끔찍한 전쟁의 트라우마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은 6.25 전쟁 기간 중 일어난 참혹했던 양민학살을 평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353p

일부 재주 좋은 작가들에게는 치열했던 전쟁이라는 특이한 삶의 조건은 실력가들에게 줄을 대고 화단정치를 통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처세술조차 없었던 작가들은 광복동의 다방가에 모여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잊기 위한 목적으로 작품을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 앞에서도 그들은 순수주의와 자연주의를 노래했으며 용기있는 데카당한 실존의 흔적을 남기려 애쓰는 지사적인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일군의 작가들은 낭만주의, 퇴폐주의에 빠져들어 기인적인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야 어찌되었던 간에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들이 이러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 또는 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의와 편의를 얻었던, 예술가들을 사회가 존경하고 예우하던 유일한 시기가 이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들의 신분만으로 보호의 대상이 되었으며 하다못해 배급에서도 우선권이 주어졌다. 종군작가라는 이름으로 입대를 면제받을 수 있었으며 많은 작가들이 종군화가단에 들어가서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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