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왕국 - 북한산성이 전하는 스물여섯 가지 한국사 이야기
조윤민 지음,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엮음 / 주류성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성과 왕국>이라 우리나라 산성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펼쳐 보니 "북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북한산성을 축성할 무렵인 숙종과 영조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시대 당시 이야기는 너무 뻔한 역사 얘기라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실제로 북한산성을 축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승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계기가 됐다.

막연히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폈고 승려들이 성을 쌓는 부역에 동원됐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조선의 불교 정책,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조선이라고 하면 무조건 불교를 억압했을 것 같은데, 왕실에서도 의례를 위해서 사찰이 필요했고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사찰을 후원했으며 일반 백성들 역시 유교만으로는 종교심을 다 채울 수 없었던지라 여전히 불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 역시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맞서 자구책의 일환으로 승군 조직이나 종이 제조, 능묘 건설 같은 공사에 동원되어 역할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이 축성되면서 성 내의 사찰을 승영으로 삼아 승군들이 수비를 맡는다.

백성들이 군역을 지듯 승려들이 서울로 올라와 산성을 지켰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승군들이 의병 활동을 펼칠 수 있었나 보다.

전쟁 후 승려가 34명이나 공신에 책봉됐다고 하니 과연 불교계가 큰 활약을 했던 모양이다.

북한산성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벌써 절판된 것이 아쉽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은 백성을 위한 왕의 큰 업적으로 칭송하면서 뜬금없이 오늘날의 청계천 준설은 개인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어이없어서 기록해 둔다.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과 단순 비교하는 것도 웃긴데 한 쪽은 애민 정신이고 한 쪽은 탐욕이라는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인상깊은 구절>

156p

던컨 교수는 조선 전기의 주요 양반 가문 38개 집안 중 넓게 보아도 16개 집안 정도를 신흥사대부로 볼 수 있으며, 이마저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 때 지배층의 대대적인 교체가 없었으며 사회 혁명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려 말의 권문세족 가문 다수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계속해서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75p

이 두 사건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 불교계가 불교억압정책에 대해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맥과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의사를 표명하고 때로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불교계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교계의 이러한 반발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세조 때를 잠시 제외하면 조선 전기의 억울 정책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177p

당시 조선사회는 억불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기에는 사회적 제약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왕실 사람들이 사찰을 찾고 불교를 믿었다. 사찰에서 왕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했으며 질병 치유를 위해서도 불교의례를 행했다. 왕실이 주축이 돼 불교경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왕조 사회에서 왕실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고려할 때, 왕실의 불교신앙은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세에서 고위 관료층 일부에서도 사찰을 후원하고 지원했다.

 무엇보다, 공인된 소수의 사찰만으론 당시 백성들의 종교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불교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에 스며들었고 사찰은 지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성리학은 윤리 규범과 예절 면에서는 효과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종교 욕구를 만족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왕실의 잦은 불교의례도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억불정책은 현실과 유리된 정책이었다.

 국가 의례에도 아직은 불교가 필요했다. 가뭄과 홍수, 흉년 등의 자연재해 방지를 기원하는 국가 의례에 불교식 의례가 활용됐다. 전염병 방지와 전란을 우려하는 민심을 달랠 때도 백성들이 믿는 불교 의례가 효과적이었다. 외교정책에도 불교가 긴요했다. 당시 외교의 두 축인 명나라와 일본은 불교를 신봉했으며 외교 절차에서 불상이나 불경을 요구했다. 원활한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불교교단 정비와 사찰 수 제한을 통해 토지와 노비를 관에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재력 확보가 가능했다. 이는 국가재정 확충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불교억압정책은 조선 초기의 불안했던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적자원 활용이라는 면에서도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는 필요했다. 당시 승려 계층은 규율을 잘 갖춘 집단이자 잘 훈련된 인적자원이었다. 조정에서는 부역의 헝태로 승려들을 성곽 축조와 건축물 공사 등 국가 토목사업에 동원했다. 때로는 종이제조와 동전 주조 등 특수한 업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목적이 달성된다면 조정에서는 무리하게 불교계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의 지배층은 억불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론 불교를 용인하고 일부 사찰을 보호하는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처한 현실과, 현실이 필요로 하는 요구에 의해 조선은 불교억압과 불교포용이라는 상반된 정책전략을 함께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는 상호모순 돼 보이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억불정책과 대치되는 정책 사안이 동시에 추진되고 일부는 파행 현상을 드러냈던 것도 이러한 이중 정책 탓이 컸다.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에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겠지만 정책 대상자인 승려들에겐 편치 않은 일이었다. 굴욕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찰의 기반을 잠식하고 불교의 저변을 뿌리 채 흔드는 존속의 위협으로도 다가왔을 것이다.

180p

조선 전기 억불정책 하에 북한산 지역 일부 사찰은 이전보다 더 보호를 받고 융성을 누렸다. 당시 왕실에는 의례와 기원을 행할 사찰이 필요했고, 도읍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북한산 사찰은 이런 왕실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산세 또한 웅장하면서도 수려했으며, 무엇보다 북한산은 도읍을 지키는 한양의 진산이었다. 삼국시대부터 북한산 지역이 불교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왕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190p

8년 동안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이후 은밀하게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도성 외곽 방위에도 중점을 두어 한양 주변 지역의 성곽을 보수하고 수비력을 강화했다. 이런 선상에서 효종 말년에 북한산성 축성이 고려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북벌 추진이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치자 효종은 집권층의 지지기반 하에서 북벌정책을 추진했지만 집권세력은 북벌의 명분만 좇을 뿐이어서 실질적은 정책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효종 시기의 북벌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북벌론을 패배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전쟁 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본다. 북벌론으로 백성의 관심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국내 문제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억누르고 민의를 하나로 결집시켜나갔다는 것이다. 효종은 북벌론을 내세워 군사력을 증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송시열이 중심이 된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붕당의 이익 추구와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삼았다고 본다.

207p

공교롭게도 20일 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압송되는 도중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왕비 폐출에 동조하지 않았던 남인 세력이 왕비 폐출과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는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내막은 차치하더라도 정국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두 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에서 숙종의 입지와 목소리는 한층 강화되었다. 남인은 정권을 잡았지만 왕권을 강력하게 견제하기에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환국은 숙종이 주도했고 정권 장악은 어부지리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결국 환국으로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왕 자신, 숙종이었다.

 인현왕후에 적대적이었던 남인 중에서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무리라고 여겼을 정도고, 사관이 인현왕후와 연결된 서인 세력에 우호적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왕비 폐출의 숨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숙종이 강한 권력욕과 이를 이루려는 과감한 실행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218p

그런데도 숙종은 여러 신하들의 목소리를 두루 듣는 편이었다.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했고, 때로는 숙종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며 근거를 들어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신하들은 의사를 표명하며 나름의 이유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했고, 거기엔 숙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거기에 종종 극단적인 감정 표출과 돌발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숙종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이러한 토론 분위기는 의외의 사실로 다가온다.

 숙종 대에도 이런 정도의 합리적인 정치협의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건국과 함께 형성된 재상 중심의 관료체제 덕분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협의체 아래서는 왕과 신하들이 여론을 살피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율되고, 재상권과 언관권이 서로를 견제했다. 이를 통해 독단의 폐해를 막고 성급한 정책결정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 했다.

221p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늘어났다. 상업적 농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부농층이 형성됐다. 사회 전체로 보면 눈에 띄는 성장임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농민이 많아지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는 유랑민이 늘어났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현상의 심화였다. 도시 빈민도 증가했는데, 한양으로 유입된 유랑민은 도성 지역의 빈민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유랑민 유입은 당시 한양 인구 증가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

222p

북한산성이 축성되는 18세기 초엔 조선과 청나라는 대체로 긴장관계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외침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동북아 정세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축성정책을 추진한 데는 대외적 요인보다는 국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왕은 고뇌했을 것이다. 정략과 결단을 통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지존의 자리를 지켜나갔지만 나라의 책임자라는 무겁고 엄중한 책무의식 또한 커져갔을 것이다. 숙종은 부지런했으며 항시 일에 철저했다.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도 깊었으며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실천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마 시대의 한계는 아직 두터웠고 그가 볼 수 없었던 난관 또한 많았다. 의지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고 정책은 종종 현실과 부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괴로웠을 것이고 또 외로웠을 것이다.

 숙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의 극단의 애증 표출만큼이나 심하게 엇갈린다.

(전에는 왕들의 나라 걱정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는데 나이를 들고 보니,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지존이지만 그만큼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미인들을 끼고 향락에 빠져 있기만 해서는 아무리 전제왕권 시대라 해도 왕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연산군처럼 쫓겨나고 말았을 것 같다)

234p

축성 결정에서 축성 시작까지의 기간이 2개월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과 지방 관청의 즉각적인 협조는 당시의 행정조직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엔 왕과 최고위 재상들의 통솔력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숙종시대에 강화된 왕권과 숙종의 정책 추진력 또한 효율적인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고 정책을 발 빠르게 추진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277p

이렇게 해서 피난처 확보와 군사방어시설 구축으로 시작된 숙종 시대의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다음 시대 국가방위정책의 밑거름이 된다. 도성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영,정조 시기 '도성 중심 방어전략'의 기반시설로 자리 잡는다.

283p

임진왜란을 전후에 나타난 이 공명첩은 돈이나 곡식 같은 물질을 통해 관직을 얻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제도였다. 태어나면서 신분이 정해지고 그 신분의 한계 내에서 사회적 권리가 허용되는 신분제도, 조선지배층의 권위와 권리의 정당성을 보장한 그 한 축을 지배층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부정'은 신분제도 자체의 허구와 모순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변화시키련느 실천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면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회피하고, 더 많은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이었다.

286p

전란 후의 피폐한 사회 실정으로 인해 국가사업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했던 것도 승려 동원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전란 후 승려의 수는 더 늘어난 상태였으며, 더구나 이들은 승단이라는 조직을 갖추고 일정한 훈련을 거친 인력이었다. 재정 악화로 곤란을 겪던 조정 입장에서 보면 승려만한 인력이 따로 없었다.

292p

교계에서는 억압을 완화시키고 교단의 존속을 위해서도 조정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정한 선을 두고 불교계와 조정의 타협이 이뤄졌으며 승군 운영은 그 한 결과였다. 조정의 불교정책에 좀 더 적극적인 승려 세력은 이를 기회로 불교진흥을 꾀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고 승려 개인이나 일부의 입신출세에 활용되었을 이다.

306p

변란을 일으킨 세력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북상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런데 변란에 대처하는 영조의 태도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랐다. 영조는 도성 외곽의 산성으로 피신하라는 대신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도성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317p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음으로써 성벽의 견고함도 높였다. 이처럼 주변에 피난성인 산성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읍성 자체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수원 신읍은 읍성과 산성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복합적인 성곽도시로 탄생했다.

 정조는 수원 신읍을 상업도시이자 자급자족의 농업지역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신읍 주변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간해 군인들이 군사 업무를 맡으면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오류>

110p

고려 전기 성종에 이어 목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왕비이자 목종의 생모인 현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 현애왕후가 아니라 헌애왕후이다. 그녀는 성종의 왕비가 아니라 성종의 여동생이고, 전 왕인 경종의 왕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