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한국고대사 학술총서 1
이기동 외 지음 / 주류성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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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학술서에 꽂혀 어려운 책들만 계속 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느낀 바지만, 역시 이런 학술서는 내가 읽을 수준이 못 된다.

이번에는 한자가 없어서 그나마 좀 편하게 읽긴 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들이라, 나 같은 비전공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포항 중성리비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없는 게 의아했는데, 여전히 논쟁 중이라 그런 듯하다.

오죽하면 마지막에 방청객으로 나온 포항시 문화재 관련자가 비문의 내용을 학자들이 정리해서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했을까.

정말 공감이 가는 부탁이었다.

중국식 한문이 완전히 도입되기 전이라 당시 신라에서 한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해석하는데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비문에 새겨진 몇 글자도 확실치 않아 연대 비정도 각기 다르다.

신사년이라는 간지가 몇 년도에 해당하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는 501년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지절로 갈문왕이 바로 지증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니 최근 只 가 中 으로 확정되어, 지절로가 아닌 중절로가 되므로 지도로 등으로 불린 지증왕과는 상관이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60년 전의 신사년, 즉 441년이 되는 셈이다.

냉수리 비문이 503년인데 훨씬 초기의 한문 구성을 보이는 중성리비가 바로 2년 전인 501년일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아무래도 훨씬 연대가 떨어진 441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또 논란이 되는 것은, 두지 사간지 궁과 일부지 궁이 작민, 즉 소작민을 모단벌훼로부터 뺏어가 소송을 했더니 중앙에서 다시 돌려주라고 판결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발표자 중에는 정반대로 모단벌훼의 작민을 두지사간지궁에 돌려달라고, 간단히 말해 원고와 피고를 정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작민을 소작하는 백성이 아닌, 인명으로 보기도 해, 뭘 돌려달라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여중죄, 즉 판결에 반하는 사람에게는 추가로 죄를 묻겠다고 하는데 누구한테 죄를 물을지도 각기 다르다.

한자 해석만 해도 어려운데 학자들마다 해석하는 내용이 이렇게 다르니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백제가 마한, 즉 전남 지역을 언제부터 실효지배 했는가에 대한 논쟁과 비슷한 논란 같다.

이 책에서도 신라가 진한 12국을 언제 병합했는지 시기 문제가 잠깐 나온다.

사료에는 훨씬 빨리 병합했는데 실제 고고학적 증거는 후대까지 독자적인 고분 양식 등이 남아있어 완전한 복속이 아닌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심도있게 다뤄지지는 않고 대략 6세기에는 경상도 유역을 실제 지배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백제의 마한 복속과 비슷한 시기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후에 비로소 3국이 한반도에 완전히 정착한 모양이다.

내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논거를 가지고 토론하는 내용이라 신라 초기 사회를 이해하는데 대략적인 개념은 갖게 됐다.


<인상깊은 구절>

134p

<봉평리비> <냉수리비> 발견 전에 왕과 왕제, 또는 매금왕과 갈문왕을 다른 세력으로 본 점에는 큰 의의가 있다. 다만 매금왕과 갈문왕의 위상 차이가 있는 '2부 2왕 중심의 6부체제'로 수정해 보는 편이 설득력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부체제적 정치운영은 사탁부 지도로 갈문왕의 집권 이후 사탁부 우위로 전환되다가 점차 집권화로 이행되어 갔다. 그렇지만 집권화와 부체제의 해체가 동시에 이행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봉평리비>에서 최상위관등은 사탁부가 독점하지만 탁부, 사탁부의 인원 배분은 대체로 균등하다는 점은 지도로 갈문왕을 낳은 사탁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집권화를 모색했지만, 법제적으로는 부체제적 정치운영을 한동안 유지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184p

신라 중앙의 정보전달을 문자로 표현하는데 있어, 냉수리비는 '敎'라는 문자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고, 이는 봉평리비와 그 이후의 비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중성리비는 중앙의 정보전달을 '敎' '云' '口' 등 매우 다양한 문자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중성리비 단계에는 아직 문자를 권력표출 의지가 냉수리비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의미한다. 중성리비의 이러한 문장 작성 방식이나 어휘 사용 방식 등으로 볼 때,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2~3년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냉수리비로 알 수 있지만, 신라에는 503년 이전에 이미 '前世二王 의 敎 '가 있었다. 503년 단계에 절거리의 사망을 걱정해 재물의 상속방법까지도 별교로 내린 걸 보면, 냉수리비에 기록된 '前世'의 시점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는 신라에서 교를 문자로 기록한 시점이 441년 무렵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307p

출토유물로만 본다면 고구려적인 요소나 경주 왕경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단언적으로 고구려의 묘제가 흥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냉수리를 거쳐서 경주로 들어간 것인지 안 들어간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답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여튼 흥해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삼국시대의 그런 세력자들이 삼국시대 초기 정도, 5세기 이후가 되면 경주의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는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제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경주의 석실묘가 어느 경로를 거쳐서 왔는지, 낙동강 쪽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고구려식의 영향을 받았다든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를 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36p

진한 시기 흥해의 다벌국이 포항 영일만 지역의 서라벌에 복속한 근기국과 함께 신라 왕국 성립 발전에 국방과 재정의 직할지로서 역사적 역할을 하게 되어 그 과정의 중요한 산물이 6세기 초의 신라 最古 금석문인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였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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