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
노중국 지음 / 학연문화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어려워서 걱정했는데 비교적 평이한 글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삼국의 역사서가 따로 남아 있지 않아 당대에 쓰여진 금석문은 역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비문이 있는 신라와 고구려와는 달리 백제는 명문이 더 적은 느낌이다.


1) 칠지도는 마한 경략을 위해 왜에 원군을 청하면서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백제에서 왜에게 선물한 것이다.

백제가 마한 때문에 왜에 군사 요청을 했는지 처음 알았다.

삼국이라는 일반적인 명칭과는 달리 근초고왕대인 4세기에도 여전히 영산강 이남에 마한이 잔존했던 모양이다.

칠지도 명문에 侯王 이라는 용어 때문에 제후, 즉 뒤에 나온 왜왕에게 백제 왕이 하사했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후왕이라는 문구는 길상어로 중국제 칼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반론한다.

왕세자가 준 것으로 쓰여진 이유는, 연로한 근초고왕 대신 태자인 근구수가 고구려 정벌 등을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합리적인 주장 같다.

2) 무녕왕릉은 양나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전축분이나 기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묘지석에 영동대장군이라는 양나라가 수여한 관직이 첫 머리에 새겨져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에서는 나라의 혼란함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양나라의 보호를 강력하게 요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일본에 전해 준 문화의 영향력 만큼 중국 왕조로부터도 현대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받았던 듯하다.

백제인은 매장 후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시신을 빈전에 모셔 놓고 3년 후에 비로소 능에 안치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보통 매장은 바로 하고 상복만 입는데, 중국에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매장과 동시에 왕은 상복도 벗는다고 한다.

뒤를 이은 성왕은 3년 동안이나 빈전에 부왕의 시신을 모셔 놓고 상을 치룸으로써 왕권 계승 의식을 대외적으로 확고하게 보여줬다.

3)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 발원기 때문에 선화공주는 설화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더니 다른 왕후일 수 있다고 한다.

혹은 선화라는 명칭 자체가 불교적 색채를 띠는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백제 유민 통합을 위해 유포된 설화일 수도 있다고 한다.

4)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왜의 백제 지배는 당시 고구려인의 백제에 대한 과장된 분노와 폄훼 의식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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