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분문화와 여성
김선주 지음 / 국학자료원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역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책들은 신뢰도가 높고 주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논리적 추론이 뒷받침 되어 흥미롭다.

본문에 소개된 실측 자료들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왜 유독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을 좀더 흥미롭게 바꾸고 일반 독자를 상대로 쉽게 쓴다면 널리 읽힐 수 있을텐데 아쉽다.

딱딱한 제목보다는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이런 식의 제목을 달고 교양서로 다시 나오면 좋겠다.

저자가 여성학자라 그런지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던 사회적 배경을, 고분 양식의 변화를 통해 추정한다.

오탈자가 많은 부분이 아쉽다.

편집자의 세심함이 부족한 듯하다.


1) 마립간 시기의 적석목곽분에는 피장자의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부장품이 많지 않다.

금관은 오히려 여성의 추정되는 무덤에 많고, 반지나 귀걸이 같은 장식류와 마구류는 성별에 상관없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많이 매장되어 있다.

무구류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흔히 보이는 반면, 장식류와 마구류는 일종의 주술적 도구로써 높은 지위자들의 위세품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본다.

금관이 제사장 기능을 하는 여성에게 부장됐다는 가설이 흥미롭다.

저자는 혁거세와 함께 알영을 二聖 으로써 받드는 문화나, 원화 제도 등을 통해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 배경에서 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넘어오면서 합장이 가능해지는데, 이 때도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와 백제가 부부장이 중심인데 반해, 신라에서는 다인장이 유행했다.

석실분은 추가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족으로서의 승계 의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추가장이 불가능한 적석목곽분 시대가 씨족 사회라는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했다면, 그 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종족이 해체되고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분화되어 묘지의 형식도 다인장을 할 수 있는 석실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백제나 고구려처럼 부부가 합장을 하는 것보다 여러 가족이 함께 묻히는 다인장이 주가 됐고, 오히려 배우자는 원래의 친족이 있는 곳으로 귀장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쨌든 저자는 신라에서 부계 중심의 출계 의식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런 배경에서 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2)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했으나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통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신라에서는 여성의 공적 활동이 권위를 갖고 있었으나 통일기에 유교적 전통이 강화되면서 성별 분업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혜공왕 역시 7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모후 만월부인이 섭정하였으나 피살당했고 진성여왕 역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 신라 멸망을 가속화 시키고 말았다.

지소태후나 선덕여왕, 진덕여왕 등이 최고 통치권자로서 권위를 가진 반면, 후대에는 사회적으로 부정시 되면서 개인의 역량 미달도 있었겠으나 통치자로서 실패하는 배경이 된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법흥왕의 아들도 아닌 외손으로서 즉위하여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군사적 배경으로 저자는 내물왕계의 후손인 이사부를 든다.

신라 최초로 병부령에 임명된 이사부가 진흥왕과 지소태후를 후원했고, 습보 갈문왕의 후손인 이차돈 역시 법흥왕 대에 왕실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내물왕계에서 분화되어 지증왕을 배출한 습보갈문왕계가 왕실 후원 세력이었다는 주장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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