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책봉의례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1
신명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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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생각보다 흥미롭고 유익했다.

역시 본격적인 연구자들의 저작은 역사를 움직이는 내면의 원리들에 대해 잘 짚어준다.

자세한 의례 절차는 어렵기도 하고 지루해서 많이 건너 뛰었지만 책봉와 봉작이라는 제도가 관료제와 더불어 조선 시대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롭게 알게 됐다.

단순히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외교적 절차가 아니라 대외적인 승인은 물론 국내에서도 책봉시 받은 교명과 금보 등을 통해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공신과 왕족들을 봉작하였다.

봉작을 받은 이들은 세습되는 특권과 경제적 부를 향유하면서 조선을 받드는 울타리가 됐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명나라가 세워진 후 공민왕이 자청하여 명의 제후국으로서 책봉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라고 하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려 한 왕이 아닌가?

원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니 간섭에서 벗어나야 하고, 명나라는 중화의 나라니 자청하여 제후국이 되려 한 것인가?

역사책에서 흔히 보는 당당한 국왕의 모습이 전혀 아니고, 오늘날 후손들이 생각하는 외교적 측면의 사대는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4p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선왕조 500년을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성리학적 유교문화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가 아닐까 싶다.

12p

주 대와 춘추시대의 봉건제도 입각한 봉작제에서는 의례가 매우 중요하였다. 사실상 독립국의 통치자인 제후들을 평화적으로 연대, 협력하게 만든 매개체가 바로 의례화된 서열로서의 봉작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례>에 수록된 의례 중의 많은 부분이 봉건 제후들의 연대, 협력에 필요한 의례였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치자들이 각각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거행함으로써 조공, 책봉 체제에 편입하였다. 삼국시대의 통치자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황제에게 국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하였다.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단순히 양반관료 체제를 보완하는 부차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국왕의 정통성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의 핵심 세력인 왕족과 공신들을 포섭, 예우하던 제도 역시 봉작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관료제와 함께 조선왕조를 규제한 가장 강력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27p

"우리 중국은 강상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77p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관계가 조선의 요청으로 시작하고, 이에 명이 반응하고, 또다시 조선이 반응하는 연속적인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제도라는 것은 조선에서 책봉을 요청하는 조공 사신의 파견, 그에 따라 명에서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조사 또는 칙사의 파견, 이후 조선에서 명의 조사 또는 칙사 파견에 대한 사은사의 파견 등이 연속적올 맞물려 있는 의례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에서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하여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의례는 기본적으로 명에서 제정한 의례를 기준으로 거행되었다. 즉 명은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할 뿐만 아니라 피책봉국에서 거행해야 할 조사 또는 칙사의 영접의례 및 책봉의례까지 <대명집례>에 규정하였던 것이다.

114p

중국에서 봉작제의 형식과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상관없이 봉작의 대상자는 왕족과 공신에게 한정되었으며 봉작에 수반되는 경제적, 형사적 특권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봉작제가 왕족과 공신 등 왕조의 핵심 세력들을 포섭하고 봉작에 따른 기득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왕조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도로 이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0p

종친, 부마, 국구는 왕의 가까운 친족이라는 점과 함께 왕권에 직접 도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왕실 봉작제는 이들을 봉작함으로써 이들에게 최고의 명예와 부를 허락하는 대신에 사환과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금하여 왕권을 안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비되었다고 하겠다.

175p

빈에게는 비록 왕비에 비해 격하된 임명의례를 거행하였지만 다른 후궁들에 비해서는 임명의례를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었다. 빈 이하의 후궁들은 임명의례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빈이 임명의례를 통해 교명을 받았다는 것 역시 커다란 특권이었다. 물론 빈 이하의 후궁들은 교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간택빈의 임명의례는 왕비 바로 아래 위치이자 후궁 중 최고 위치인 빈의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202p

왕자 봉작 이후에 교지와 녹봉 그리고 공상과 전결을 받는 것은 왕자 봉작이 일종의 관료 임명으로 간주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대군이나 군 또는 공주, 옹주는 비록 어린 나이에 봉작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봉작 이후에는 독립적 생활단위인 房 으로 간주되었다. 정식으로 봉작된 후 방을 구성하면 그에 상응하여 공상과 전결을 지급했던 것이다.

219p

지방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지방 군현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현지의 향리들이었다. 고려시대 군현의 잡공 즉 상공과 별공 및 삭선, 별선 등을 징수하여 중앙정부 또는 궁중에 상납하는 책임 역시 군현의 향리들이 지고 있었다.

220p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군현 향리가 잡공을 징수하여 중앙 각사에 상납하면, 이를 중앙 각사에서 궁중에 공상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됨으로써 고려시대의 잡공을 계승하는 공물 징수와 상납을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책임지게 되었다. 

230p

형평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양도성을 무단으로 이탈하지 말아야 하는 규정을 어긴 종친보다 이들을 서울로 돌려보내지 못한 수령이 더 중벌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물론 지방 수령과 종친을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들이 공동이익에 근거한 일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였다.

341p

을미개혁으로 각 전궁에 소속되었던 환관과 궁녀는 거의 대부분 도태되고 그 대신 기왕의 환관과 궁녀의 10% 정도에 불과한 관료들이 배속되었다. 이는 기왕의 환관과 궁녀를 보유하던 조선왕실 구성원들의 권리가 을미개혁을 통해 크게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가 줄었다는 측면에서의 권리 위축이 아니라 배속된 사람들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권리 위축이었다. 왜냐하면 각 전궁에 소속된 환관과 궁녀는 기본적으로 각 전궁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존재지만, 관료들은 충성보다는 오히려 관리 또는 감독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367p

조선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는 고려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 사용되지 않던 명복이 추가로 사용되었다. 왕비의 명복은 근본적으로 명에서 받은 것이므로 이를 책봉의례에 사용한 것 역시 조선왕실의 의례가 제후국 체제에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의 황자와 황녀에 대한 책봉의례가 있음에 비해 조선시대 왕자와 왕녀에 대한 봉작의례가 없었던 이유는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실이 명과 동일하게 왕자와 왕녀를 책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자와 왕녀의 봉작 자체가 책봉의 효과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책으로 작위를 임명하던 대상은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에 한정되었다. 나머지 후궁, 왕자, 왕녀는 비록 왕실 작위를 받는 대상이기는 했지만 책으로 임명하지 않고 교지로 임명했다. 이는 왕의 배우자 중에서 처첩을 구별하고 자녀들 중에서 장자와 중자 그리고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372p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에도 황실 구성원들은 환관과 궁녀를 받지 못하였고, 나아가 진상과 공상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기의 황실 구성원들은 책봉된 후 인적 측면과 물적 측면에서 큰 권리를 향유하였다.

 대한제국기 친왕의 물적 권리를 오히려 조선시대 왕자군의 물적 권리보다 더 커졌다. 의친왕은 친왕에 책봉된 후 대략 40만 평의 토지를 확보했는데, 이 규모는 의친왕이 의화군에 책봉된 후 확보한 42만 평과 근사한 규모였다. 따라서 의친왕은 의화군에 책봉된 후 42만여 평, 친왕에 책봉된 후 40만여 평 합하여 82만여 평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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