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전작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은 스페인의 중세 이야기였고, 이 책은 후속판 격으로 근현대사에 관해 쓰고 있다.

전공한 학자도 아닌데 이런 자세한 역사책을 발간했다는 게 신기하다.

아무래도 스페인 현지에 있다 보니 스페인에서 직접 발간된 책들을 참조해서 내용의 충실도가 높은 듯하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쉬운 문체로 소개하는 책을 본 적이 없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저자의 두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20세기 역사는 다소 지루했다.

세계사적인 중요도가 떨어지는 시대라 더 그런 것 같다.

온건파와 공화파의 대결 속에서 군부 쿠데타가 지속되고 프랑코가 근 40여 년에 걸친 독재를 자행하고도 유럽 민주주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인상깊은 구절>

33p

알바 공작이 1할세를 걷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알바 공작으로서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보내는 돈은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를 일반적인 식민지로 생각했다. 본국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36p

이러한 약탈이 계속된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 용병들의 급여가 제때 지불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국적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군인들은 애국심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뿐이다. 스페인에서 급여가 지급이 안 되니 도시를 약탈해서라도 이득을 챙기고 보급을 해야만 했다. 이는 딱히 스페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다. 이 시기 유럽의 대다수 나라는 용병을 주로 이용했는데 문제는 용병의 경우 군기가 엉망이었고, 급여를 지급받지 못하면 점령지를 약탈하는 일도 흔했다는 사실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져올 수 있었던 스페인이 왜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을까?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 많은 금과 은이 있었지만, 은행에서 필요할 때처럼 꺼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스페인을 왕래하는 배편은 일 년에 많아야 두 편이었다. 게다가 해적들은 그 배를 약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수송선이 무사히 세비야에 도착했다고 네덜란드에 바로 보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다시 네덜란드의 지역으로 수송해야 했다.

59p

펠리페 2세는 열심히 일하는 군주의 전형이었다. 루돌프 2세가 이처럼 수집에 열중하는 동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펠리페 2세도 결국 죽고 말았다. 펠리페 2세는 평생 춤이나 술, 파티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취미는 책을 읽고 미술품, 시계, 무기, 특이한 물건 등을 모으는 일이었다. 부인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고 거리를 두는 편이었으며 금요일, 토요일, 종교 축제 전날에는 혼자 저녁을 먹을 정도였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왕이 된 후에 나라 걱정으로 쉴 새가 없었다. 그는 통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했다. 일 중독자였던 펠리페 2세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점심 때까지 수많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했다. 가족과 거리를 두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차갑고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펠리페 2세 시절만 해도 귀족들은 궁정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 능력이 뒤떨어졌고 정치에는 큰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를 대신해 줄 사람, 섭정이 필요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던 레르마 공작과 누군가 대신해서 나라를 통치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펠리페 3세는 서로에게 딱 필요한 사람이었다.

 현재를 즐기자는 자세는 펠리페 3세가 왕이 아니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대한 영토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왕이었다. 그가 나랏일을 외면하자 신하들도 나랏일을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느라 바빴다.

67p

전쟁, 전염병 외에 스페인 본토에서 신대륙으로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점에 모리스코를 추방하자 스페인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제일 큰 피해는 농촌에서 나타났다. 모리스코는 주로 농촌에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리스코가 추방당해 스페인을 떠나자 대체 인력을 구할 수 없었던 농촌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인구가 줄어들어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17세기 초중반에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많은 농경지와 목초지도 파괴되었다. 

74p

올리바레스의 연합군 제도에는 군대 유지비용도 절약하고 스페인 출신의 강력한 국민군을 육성하여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 군대도 용병이 아닌 프랑스의 국민군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만약 스페인이 올리바레스 대공의 원안대로 연합군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영국을 공략하여 다시 한 번 유럽의 패권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08p

30년 전쟁의 희생자 수는 750만 명에 이르렀다. 신성로마제국은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2100만 명이던 신성로마제국의 인구는 13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종교가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30년 전쟁을 겪으며 종교 때문에 지옥과 같은 일들이 현실 세계에 펼쳐지자 신과 종교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아무리 종교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17세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속속 등장해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과학 발전에 기여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종교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나며, 종교의 힘은 약해졌다.

 스페인은 신성로마제국처럼 초토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은 신교를 인정하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며 발전해 나갔다.

238p

스페인이 절대왕정으로 돌아가자 제일 먼저 신분제가 다시 생기고, 종교재판이 부활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은 자유주의 무역으로 부를 쌓고, 교회보다 이성을 중시하여 발전하던 다른 유럽 국가와 정반대의 길 걸었다. 카디스 헌법이 무효화 되면서 자본주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인 길드가 부활하여 생산을 통제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활보하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이념이 전파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프랑스 중심으로 통일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는 유럽을 제패하면서 한 나라를 점령하면 그 나라의 왕을 유폐시키고 그의 친척을 왕위에 올린 뒤, 프랑스식 근대화된 제도를 도입했다. 나폴레옹이 점령한 나라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이유는 거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 덕분에 유럽의 근대화가 앞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프랑스 혁명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프랑스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다른 나라에 무력을 동원해 강요했다. 나폴레옹의 강제적인 근대화는 그게 얼마나 좋든 간에 많은 사람이 불만을 품었다. 그런 이유로 나폴레옹이 사라지마자 다시 절대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생겨났다. 

 페르난도 7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스페인은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상업 활동이 마비되어 있었고, 은행은 파산 상태였다. 스페인이 사상적으로 뒤처져 있었지만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에 거대한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힘이 약해지자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시도했다. 예전에는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을 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 식민지들도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247p

개혁이 성공한 뒤 집단 간 의견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격해지면서 일상생활은 위협을 받는다. 일상생활이 위협받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개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개혁을 지지한 이유는 잘살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혼란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차라리 절대왕정 시절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나타났으며, 뒤늦게 근대화된 스페인에서도 반복되었다.

268p

자유 진영이 진보파와 온건파로 분열하고, 온건파와 진보파의 대결로 정국이 혼란해지는 상황은 스페인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전 유럽에는 자유주의가 자리를 시작해서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다른 유럽 나라에서도 자유주의 내 갈등이 심했다. 자유 진영 내부에서 갈등이 생긴 이유는 정치 참여와 직결되는 투표권을 국민 누구에게 얼마만큼 주느냐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될 수 있으면 투표 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소수에게 주려고 했고, 진보파는 더 많은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기 원했다. 진보파도 여성의 참정권은 제한했지만, 일반적으로 진보파의 입장이 오늘날 민주주의에 더 가까웠다. 

291p

공화국 정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제 이룬 성과는 별로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에는 귀를 기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에서부터 큰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공화정 출범 이후 짧은 시간 여러 명의 대통령이 바뀌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지친 상태였기에 안정을 원했다. 최초 공화정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실패한 바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안정적이기만 하다면 약간의 불합리함이 있더라도 기존 방식을 선호했다.

 스페인에서 정치적 안정이란 기존 방식대로 다시 왕을 옹립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국민에게 제한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뜻했다.

300p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카노바스는 보통선거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정 조건을 지닌 사람만 투표와 선거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정부에서는 의회에 들어갈 수 있는 의원 후보자의 자격과 의원을 뽑기 위해 투표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그 자격 요건의 핵심은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의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투표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돈이 없는 농민이나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온건파 정당은 자본가의 편에 서서 자본주의를 숭상했다. 



<오류>

48p

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자리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이며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를 앉히려고 했다.

->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그 손녀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다. 마거릿 튜더는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이므로,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의 5촌 조카이다.

121p

마르가리타 공주는 21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네 번 임신했고 그중 두 번을 유산했다. 

-> 레오폴트 1세의 배우자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중 뒤에 낳은 두 명이 그 해에 사망했으므로 유산은 아니다.

201p

카를로스 4세는 사촌인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와 결혼했다. 그녀는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부인 파르네제와 같은 파르마 출신이었고,

-> 마리아 루이사의 할머니가 곧 파르네제이고 아버지인 필리포와 카를로스 4세의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친형제이므로 특별히 마리아 루이사만 파르마 출신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

217p

페르난도 7세는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의 아홉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 페르난도 7세는 여덟 번째 아이이고, 장남이다.

251p

페르난도 7세의 두 번째 부인은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포르투갈 왕 주앙 4세와 그의 누나 카를로타의 딸이었다.

-> 마리아 이사벨은 주앙 6세의 딸이다.

298p

알폰소 12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사촌이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가 사촌간이므로 둘은 6촌 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