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의 라이벌 - 감성과 오성 사이 석학인문강좌 46
이태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석학인문강좌 시리즈는 주제가 참 좋고 내용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청중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져 편안하게 읽힌다.

표지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게 바꾸면 훨씬 더 독자들에게 많이 읽힐 것 같다.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이라는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참 좋다.

특히 박수근과 이중섭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중섭 그림이야 워낙 유명하고 직관적으로 강렬한 감동을 주지만, 사실 박수근 그림은 너무 소품이 많고 비슷한 스타일이라 크게 관심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박수근의 작품이 주는 미적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흑백 도판이라 무척 아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가 그린 유화들의 색감이 얼마나 조화롭고 따뜻한지 새삼 알게 됐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수묵화 비교도 참 좋았다.

컬러 도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김정희 예술론에 대한 비판은 무척 신선했다.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읽으면서도 너무 지나친 찬사는 아닐까 의아했는데 역시 저자도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고루한 부분을 지적한다.

국제화라고 보기에는, 그가 접했던 청나라 문인들도 당대 일류가 아니었고 예술가로서의 작품보다는 문인화가로서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예술론과는 맞지 않는 듯 싶다.

진경 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이, 실경을 그대로 그렸다기 보다는 중국이 아닌 우리 산천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과장과 변형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향을 표현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오히려 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이는 가히 조선 최고의 화가라 할 수 있는 김홍도였다.

그야말로 진정한 환쟁이로 현대적인 의미의 화가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책에서는 정선에게 김홍도가 배웠다고 되어 있던데 이 책에서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정선은 김홍도 같은 화원, 즉 직업적인 화가라기 보다는 고위 관료들과 어울린 정통 양반이었기에 작품 세계의 결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중앙 정계에서 활약한 김정희 역시 정선이나 김홍도 등과는 전혀 다른 예술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정약용이나 박지원을 성리학을 넘어선 이들로 묘사하는데, 그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약간의 개성은 있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근본적인 성리학자였고 그 틀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은 구절>

5p

작품의 감상 또한 창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개입되기 때문에, 예술은 눈과 손의 원초적인 감각행위인 동시에 이성작용으로 완성되지요. '창작'이나 '감상'이라는 예술행위 하면 감성적 측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림을 읽거나 해석할 때는 이성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이처럼 작품의 구상부터 붓을 떼고 마무리하기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물론이고,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단계에서도 오성과 감성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단순히 한 개인이 느끼고 즐기는 방향으로만 흘렀다면, 예술이 인문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동시대는 물론이려니와 후대 사람들과도 함께 미를 공유하면서 예술이 인문학 영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해 왔지요. 인문학이 인간을 탐구하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류사회에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바로 화가, 곧 예술가 아닐까요. 보통 예술가라고 하면 동물적인 몸의 반응과 직관이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예민하고, 자유의지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감정을 앞세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만큼 예술가에게 자율성이 부여되고 창조성은 배가되지요. 

55p

강세환은 정선의 과장 방식에 대하여 "평생 익힌 대로 필법을 휘둘러 바위의 형세나 봉우리 형상의 구분 없이 한결같이 열마준법으로 어지러이 그려냈기에 '사진'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라며 현장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적 평가를 남겼지요.

105p

정선은 실경의 리얼리티를 뛰어난 직관으로 구성하여 누구나 공감할 '진경'산수화를 창조하였습니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이들의 회화형식을 대표하지요.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易理 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도 맞물립니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 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136p

김정희는 까다로운 안목에 걸맞게 지필묵과 문방구류도 명품을 선택했고, 그것들의 사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正道 를 지켰던 것 같습니다. 최고와 완벽을 추구하는 귀족적 인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71p

얼마나 썼길래 1000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을까요. 이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단순히 감성에 의존한 게 아니라 엄청난 훈련과 투혼으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시사합니다. 물론 스스로가 글씨 쓰기를 크게 즐기고 일상화했던 삶이 밑바탕에 깔렸겠지요. 추사체의 위대함과 자랑거리는 바로 그런 장인정신에 있습니다.

193p

김정희는 제자들에게 정선이나 심사정처럼 그림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그림이 송,명의 고전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제시한 그림이 주학년의 작품들입니다. 김정희가 직접 만난 주학년의 회화는 송~명대 이후 남종문인화풍의 갈필로 그린 피마준 작품으로 남종산수화풍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주학년은 중국화회사 관련 도록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도 걸러 도판 하나 찾기 힘든 화가입니다. 김정희는 자기가 만난 화가가 중국의 전부라고 인식했던 셈이지요.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 흔히 일류가 아닌 삼류와 접하기가 쉬운데 그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즉 김정희는 삼류의 외래문화로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지요. 그러니 원교체에 대한 불만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나 문인화풍에 눈길이 갈 리가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서화 창작론을 토대로 김정희 스스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업적이지요.

195p

정약용이 형사나 사실 표현을 강조한 화원이나 직업화가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고, 그림다운 그림으로서 회화의 '기능'적인 면을 우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진정한 회화의 가치가 사의나 문기를 중시하는 여기적 '취미로서의 그림'이 아닌 전문 화가들의 잘 그린 '業 으로서의 그림'에  있다고 여겼지요.

205p

김정희의 '완당 바람'은 19세기 문예계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18세기 회화의 신경향에 대한 반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이나 중서층 서화가들까지도 김정희식 서권기, 문자향에 경도될 정도였지요. 이들의 남종화풍은 간결하고 감각적인 필치와 수묵 처리로 회화성을 구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에는 북산 김수철, 석창 홍세섭 등 기괴론에 어울리는 독특한 개성주의 작가들이 부상했지요. 결국 '완당 바람'은 19세기에 사실주의 회화를 퇴조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사실정신, 그리고 이광사의 조선적인 서체 등 국풍의 문예를 잠재운 19세기 김정희 예술에 담긴 철저히 고고한 격조의 귀족 취미와 후대에 미친 큰 영향, 그리고 시대조류 방향에서 어긋나는 비현실적인 미감에 대하여 술회하였습니다.

 장승업은 중국의 고사인물도와 기명절지, 화조, 영모화 등을 즐겨 그려, 이미 그 주제가 시대정신이나 18세기 조선풍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하지만 필묵을 다루는 데 있어 수준급 기량을 발휘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33p

이상범은 제1회 선전에 출품하면서 일본화를 직접 익히려 이듬해인 1923년경 일본을 다녀오지요. 나는 우연히 1930년대 일본 교토지방의 전시회 팜플렛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범의 <초동>을 비롯한 당대 산수화풍이 거기에 나온 삼류 화가들의 그림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이상범이 일본의 유명한 일류화가의 그림보다 당시 조선인이 잘 모르는 삼류화가의 그림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지금도 공모전에 나오는 작가들이 유명하지 않은 외국의 스타일을 베끼는 경우가 종종 불거지기도 하지요.

287P

고희동이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자신이 이 혜택을 이용해 특례입학자로 갔다는 설이 있지요. 그의 그림들을 보면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회화적 역량이 떨어진 화가라고 판단됩니다.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수묵화가로 전향했는데, 이마저도 회화적 수준이 낮았지요. 실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기보다는 원로라는 정치적 위상을 갖는 데 그쳤습니다.

291p

한국문화에 내재된 야수파적인 혹은 표현파적인 기질이 선명히 드러나네요. 흥과 신명이 넘치는 한국인의 가슴에 야성이 가득차 있는 것일까요. 자극적이거나 거칠면서 단순한 형상을 선호하는 민족입니다. 서구 모더니즘 사조에서 표현주의가 큰 갈등 없이 쉽게 젊은 화가들에게 소화된 연유도 그러한 데 있지 않을지요. 

348p

박수근은 이중섭처럼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시대를 심하게 앓던 화가도 아니었지요. 그림도 잘 팔리는 편이어서 인정된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노동을 통해 만든 예술작품을 팔아서 내 삶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 역할을 할 수 있었지요. 때문에, 박수근은 이중섭보다 크게 유복했다고 봅니다. 이중섭이 자기 그림이 안 팔리는 현실에서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며 삶을 포기하려 거식증까지 걸렸던 데 비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1957년 박수근을 힘들게 한 사건이 생깁니다. 국전에서 박수근 그름이 낙선을 한 것이지요. 사실 그 당시 박수근 나이면, 친구들이 다 국전 초대작가나 심사위원을 할 때입니다. 출품하기가 껄끄러웠을 법한데, 그럼에도 자꾸 작품을 출품했지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열등감 내지 학벌이 없는 점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요. 국전에서 큰 상을 받으려 했을 터인데, 심사위원들이 1857년에 낙선을 때린 것입니다. 국전 탈락은 박수근에게 큰 치명타였지요. 청빈한 기독교인으로 약주도 안 들던 박수근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이는 자기 몸의 손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백내장에 걸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말년 그림이 범벅이 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요. 내향적 인간의 전형이었던 이중섭이 개인과 시대적 아픔의 복합으로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듯이, 박수근도 잘 나가다가 얻은 개인적 외상이 회화 세계보다 몸을 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안타깝다. 한국 최고의 화가로 숭앙받는 이중섭이 나는 밥 먹고 살 인간이 못 된다면서 거식증까지 걸리고, 그림값이 제일 높아진 박수근이 친구들은 국전 심사위원인데 거기에 작품을 출품하고 낙선됐을 때 그 좌절감이란... 인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르겠다. 고흐만 안타까운 삶을 산 게 아니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그 괴로움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영혼이 있다면 훗날에라도 인정받고 있음에 위안을 얻으려나. 너무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365p

뉴욕 시절 작업일지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점화는 낯선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그 외로움을 별들과 함께 달랬던 결과입니다. 한국의 자연을 연상하며 목 놓아 부른 김환기의 연가이고요. 비록 김환기가 뉴욕생활을 통해서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이미지를 영감으로 삼아 풀어 놓은 추상화는 20세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우뚝한 성과입니다. 어렵고 낯설어서 감상자를 유리시키는 보통의 추상화와 달리, 한국인의 마음에 편안한 공감을 던져줍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김환기의 추상화는 그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파란 색감과 달항아리, 하늘, 별 같은 소재들이 마음을 울린다. 뉴욕이라는 현대미술의 최첨단인 곳에서 작업했음에도 너무나 한국적인 감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류>

83p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과 4군의 풍경을 담은 <해신첩>, 선조가 그 화첩을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에게 선물한 일

-> 선조가 아니라 순조가 매형인 홍현주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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