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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경의 역사
전덕재 지음 / 새문사 / 2009년 4월
평점 :
신라 왕경이었던 경주의 도시 구조를 밝히는 앞부분이 너무 어려워 끝까지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이다.
중간 부분부터 제대로 읽었는데 생각보다 소득이 크다.
1) 저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당나라의 장안성처럼 방으로 구획되어 있었다고 본다.
처음 듣는 얘기라 정말 신기했다.
큰 담으로 둘러 싸여 대략 30여 채의 가옥이 살았고 방문을 방장이 관리했다.
당나라나 북위 등 중국의 방은 2000여 가옥이 살았다고 한다.
경주에 1300여 개의 방이 있었는데 경주 인구를, 戶가 아닌 口로 해석하여 17만 9천 여명으로 본다.
지방민의 무분별한 이주를 막고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한마디로 주민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방을 설치해서 관리했다.
전근대인들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해진 구역에 갇혀 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2) 신라인의 조상은 한 무제에게 고조선이 멸망당한 후 경주 분지로 내려온 유민들이라고 한다.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한반도로 넘어온 진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가 진한이고 고조선 유민이 세운 나라는 마한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중국과 한반도 북부에서 삼한 땅으로 내려와 지역민들과 합해져 고대 국가를 형성했던 것 같다.
저자는 신라 6촌의 명칭이, 고조선 유민들이 정착했던 경주의 여러 들판 이름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고조선 유민들을 진한인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논증은 없어 아쉽다.
6부 중 훼부와 사훼부, 그리고 모량부의 박씨 왕실 후예들만 진골 귀족이 되고 나머지 3부인들은 6두품까지 골품을 받는다.
그 외 지방민들은 골품제에 편입되지 않고 공민이 되어 외위를 받았다.
사로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해 가면서 땅을 넓힐 때 이들은 지방민으로 편재되어 왕경 6부인에게 공납을 바치고 奴人 으로 명명된다.
저자는 신라가 망할 때까지 한 번도 천도하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처음 신라가 세워질 당시의 왕경 거주민들이었던 6부인들이 진골 귀족화 되면서 마지막까지 그 외 지방민들을 다스렸다.
간단히 말해 신라는 국가가 처음 세워졌을 때의 중심세력이었던 왕경 6부인들이 그 후로 주변국들을 점령하면서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도 지방민들을 피지배층으로 통제했다는 것이다.
진골 귀족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하대에 이르러 지방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고구려,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페쇄적인 통치 체제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지방에 세력 기반을 둔 고려를 훨씬 개방적인 사회로 평가한다.
지난 번 안동김문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역시 서울에 세거해야 권력층이 되는 모양이다.
지방 차별은 비단 21세기 현대의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