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계보와 구성원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5
원창애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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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던 조선 시대 종친과 의빈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책이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통계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결론을 낸 책이라 신뢰도가 아주 높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서 교양서로 바람직한 수준이다.

종친은 왕의 4대손, 즉 현손까지로 관직에 못 나가는 대신 종친부에서 관작과 녹봉을 줘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5대손부터 9대손까지는 원친이라 하여 친진되는 대신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전에도 이미 음직 등으로 많이 출사해서 관료가 된 후에 문과에 급제하면 국가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당상관으로 빠른 승진을 했다.

10대손은 원친에서도 배제되지만 그렇다고 나몰라라 하지 않고 국가에서는 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혜택을 부여해 왕실 후손으로서 위엄을 세워준다.

종친이 4대손까지 일종의 사회적 금고에 처해지는 반면, 왕의 외손들은 경제적 혜택과 더불어 관직에 나갈 수 있고 빠른 승진이 가능해 조선 후기로 올수록 문반 관료 가문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명공주와 혼인한 풍산 홍씨의 홍주원 가문을 들 수 있다.

종친이라고 해서 대를 거듭할수록 다 번성했던 것은 아니고, 후손들이 생원, 진사시에 붙어 관직에 나가서 관료가 되어야 하고 특히 혼맥이 중요했다.

좋은 가문과 혼인을 맺어야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데, 종친은 원칙적으로 사대부가와 혼인해야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서얼이나 중인 가계와 혼사를 맺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사대부들이 첩의 자식과의 혼사를 꺼리기 때문이다.

본인은 적자라 하더라도 윗대에 서자가 있으면 서자 가문으로 인지되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왕의 후손이라 해도 어머니가 첩이면 관료로 나가기 힘들고 혼사도 격이 떨어지는 가문과 이루어지면서 중인 가계로 전락하는 경우도 간혹 발생했다.

조선 시대의 양반이란 집안에 적어도 관료나 관료 예비군이 있어야 하고, 혼인을 통해 가문의 격을 유지했다는 말이 이해된다.

아버지의 신분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도 사회적 지위 확립에 매우 중요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조선은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던 게 분명하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는 매우 다르게, 가문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여러 대에 걸쳐 애를 써야 비로소 자손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그것도 영속적인 게 아니어서 당대의 노력이 없으면 다시 몰락하게 되는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가문이라는 집단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조선 초기에는 태종이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아서 외척가문 성장이 어려웠으나, 16세기 이후는 왕실 혼인이 외척가문의 성장 내지는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의 혼인은 현달한 가문이 그들의 族勢 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41p

송에서 親 이 다한 5.6대 왕실구성원에 대한 배려로 단문친의 관직 제수와 종실 親試 를 제도화하여 그들이 왕실 후손으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도 역시 단문친에게는 돈녕부 관직 제수라는 통로를 열어 주어 왕실 후손이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44p

세종 종친 봉작법에 자품은 없지만, 정1품으로 규정되었던 대군과 군은 <경국대전> 종친 봉작법에서 무품으로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왕자가 왕세자, 대군, 군 등의 서열이 있긴 하지만 모계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종친과 관료와는 비교될 수 없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였다.

51p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종법은 승습할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양자를 세워 승중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조선 전기의 종법에 대한 인식은 적장자의 후사가 없으면 중자가 계승하고, 중자 역시 후사가 없으면 첩자가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통성이라는 명분이 아니라 혈엽에 입각하여 종법이 시행되었다는 증거이다. 결국 <경국대전>에는 당대의 친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63p

17세기 중엽 이전 왕후보첩 수록의 기준점이 왕후의 고조부가 아니라 조부였던 것은 보첩이 미비된 것이 아니라 조부 이하의 자손을 친족으로 의식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오복제에 의한 친족 의식이 왕실에도 나타났다. 영조는 왕실의 친족을 종성 4대손까지, 이성은 외손자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원계보기략>에 잘 반영되어 있다.

67p

정조 역시 대동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탕평을 통해서 권력과 이념을 주도하려 하였으므로 왕실가문의 지원이나 영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 권력의 주도권은 국왕에게서 세도를 장악한 관료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정국하에서 국왕은 공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수장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가문의 대표자로 전락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의 왕실구성원은 계속 쇠락해 갔다. 선조대 이후로 종친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효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의 소생 왕자군은 왕위를 계승할 원자 1명만 두었으며, 숙종이 낳아 장성한 왕자 두 사람은 모두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종친이 거의 없었다.

76p

사왕 자손은 일련의 조처를 통해서 완벽하게 왕실구성원이 되었다. 태종이 이들을 선원세계에서 배제했던 정책이 이때 논란 없이 폐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사왕 자손이 더 이상 왕위 계승권 경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왕의 4대손까지 종친으로 봉작하더라도 고종대에 와서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 대한 군역이나 천역 면제는 12대 손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12대손까지라는 제한이 큰 의미가 없었다. 이들은 선원의 지파로 이미 대수에 상관없이 국역에서 면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을 왕실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쇠락한 왕실을 재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왕 자손을 포함한 왕실 후손이 하나의 거대한 가문임을 보여 줌으로써 왕실이 허약하다는 인식을 불식키시고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103p

얼마 되지 않는 종친도 역모에 연루되는 자가 많아서, 종친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특별히 조선 후기에 종친의 정치적 희생이 많았던 것은 왕통의 정당성이 약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에 왕후에게서 난 적장자가 왕통을 이은 예는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대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왕실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108p

이주가 자신의 서녀를 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자, 종친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대해서 성종은 종친이라도 천첩 소생을 명문가에 억지로 혼인시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종친의 적서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족과 혼인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종친이 지체 낮은 집안과 함부로 혼인하여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종부시에서는 종친의 혼사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단속하고, 종친과의 혼사를 거부하는 타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에는 처벌까지 하였으나, 당시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11p

서자 출신 종친이 대부분 서자 혹은 중인가문과 혼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종친은 적서와 상관없이 사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반드시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의 혼인에 있어 家格 은 무시할 수 없다. 가계가 서자 계통인 경우 그 집안의 가격이 점차 낮아지기 마련이다.

112p

영순군의 활발한 정치 활동은 그의 자손들이 명문가와 혼인을 맺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결국 종친으로 가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하고 그 후손들이 번성할 수 있으려면, 첫째, 종친이지만 정계와의 긴밀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둘째, 서자 가계 출신보다는 적자 가계 출신이어야 했다.

184p

왕후를 배출한 성관끼리 서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왕후가문에서 지속적으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혼인이 사회적 지위를 형성 유지하는 데 중요 요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190p

17세기 현종비 이후 선대 부계 친족 특히 왕후 부친 형제, 종형제 등이 관원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왕후가문이 명문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원군 이외의 외척가문 출신 관료가 관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 왕후의 모계 선대 친족까지 보태진다면 왕후의 친인척이 왕후 책봉 이전에도 정치 세력화되어 있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었음을 밝힐 수 있다. 이것이 17세기 외척이 조선 전기의 외척과는 다른 면모이다.

201p

두 왕후의 친족은 관직 진출이 용이하긴 했으나,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당상관으로서의 승진은 많지 않아서 척신정치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205p

정희왕후는 수렴청정 당시 원상과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성종 즉위 전부터 원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이 원상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원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대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겸판서 제도를 활용하였다. 정희왕후의 친족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였던 사람은 극소수이며, 인척 중 몇 사람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순원왕후의 친족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고, 그중 많은 인원이 당상관에 포진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희왕후의 측근에 있었던 친족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전기만 해도 수렴청정 제도가 비교적 잘 운영되어 한 가문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도적으로 수렴청정이 미비된 상태라 그럴 수도 있고, 정희왕후가 측근정치를 하지 않고 대신들과 같이 국정을 운영하는 현명한 선택을 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순원왕후 시절의 세도정치와는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다)

212p

조선 전기 국왕의 외손은 문과 합격자 인원이 매우 미미하였으나, 선조대 외손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16세기 이후 왕실 인척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것은 문과를 통한 관계 진출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문과에 합격한 후에 관계에 진출해야 참상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 승진이 용이해지는 관료 체제가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왕실 인척도 역시 문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려 했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손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러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사림정치가 활발해지자 사림가문 외척의 정치 참여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왕후가문에서의 관직 점유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247p

국왕의 4대손까지는 왕실 근친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진된 이후 국왕의 원친은 사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었다. 친진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못한 왕실 원친은 16세가 되면 충의위나 족친위에 소속되어 군직을 받을 수 있었으며, 잡역도 면제되었다. 국가에서의 경제적 지원이 있을 때에 왕실 후손들은 손쉽게 과업에 힘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국왕과의 촌수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았고, 서울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인적 교류의 폭도 넓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원친이 문과에 합격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52p

친진되어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원친은 그 이전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야만 했다. 특수 병종에 입속하여 서반 관직을 받는 것으로는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했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생원, 진사를 획득하는 것이다.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원친 가계에서는 우선 생원, 진사를 획득하여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생원, 진사를 획득한 이후 문음으로 관직을 획득하고, 청요직과 당상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문과에 응시하였다. 

257p

 원친이 문과에 합격하여 많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인조대에서 정조대까지로 치우져 있었다. 이 당시에 왕실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국외적으로는 전쟁을 겼었고, 국내적으로는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정립해야 했으며, 당쟁정치로 인한 페혜도 컸다. 또한 왕실 후손이 귀한 시기에 국왕들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정계에서 활동하는 왕실 후손들이 국왕의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왕들은 능력이 있는 원친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여 정계를 이끌어 가게 하였다.

 그러나 10대손 이하 문과 합격자가 정계에 많이 나간 시기는 19세기였다. 이 시기는 척신 세도정치가 형성된 시기였다. 그러나 왕실 후손 관료들이 세도정치의 핵심이 될 수는 없었다. 정3품 당상관까지 승진되기는 하였으나, 척신 세도가들이 왕실 후손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지 않아 정국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258p

조선에서 사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가문 내에서 생원, 진사가 배출되어야 한다. 중종은 4조 이내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가 있어야 하고, 문,무과 합격자의 자제 그리고 당사자가 생원, 진사이어야 사족이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가 있다. 이 규정은 전가사변이란 형률에서 면제될 수 있는 범위의 사족을 언급한 것으로, 좁은 의미에서 사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을 확대하면, 대수는 차치하고라도 가문 내에 6품 이상의 관직자, 문,무과 합격자, 생원,진사 등이 있어야 사족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문 내에 관료나 관료 후보군이 존재해야 된다.

261p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는 시기적으로 17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의 거주지는 거의 정주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주는 평안도 지역으로 사족이 드물고 상업이 성행한 지역이었다. 중국의 명과 청이 교체되자, 평안도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서북 지역이 국방상 요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사는 지역민들을 성리학적으로 교화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변방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특히 문과, 무과의 경우에는 道科 라는 이름으로 함경도과와 평안도과를 신설하여 그곳 지역민만을 대상으로 시험이 시행되었다. 서북 지역민에 대한 교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원, 진사나 문과 합격자가 급격히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정주에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안원대군파 역시 그러한 경우이었다.

 관료가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생원, 진사의 배출이나 문과 합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문과 합격자가 연속적으로 배출되어야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표23>에서 10명 이상의 문과 합격자를 낸 17개 파가 핵심 관료가문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문과 합격의 연속성이 강하게 나타난 가계만이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하였다. 

270p

그가 늦게 관계에 나가서 80세가 넘을 때까지 관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정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과의 깊은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수광과 그의 형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나, 이유간이 교유한 인물들은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계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다. 

275p

이경석은 최고 엘리트 관원의 승진 경로를 그대로 밟았다. 문과에 합격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오른 것은 초고속 승진이었다. 이경석이 참상 청요직을 두루 거쳐서 당상관에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인이 주도하는 정계에서 관료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시기에는 정치적인 장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 이경직과는 달리 참상 청요직을 거쳐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290p

이천수 집안에는 삭과를 당한 인물이나 역당으로 몰린 인물이 있기는 하나 조선 후기까지 문관 관료가문으로서의 문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경직, 이경석 가문과는 달리 노론가문으로서 정치적인 부침이 적었기 때문이다. 

307p

이처럼 무과를 통한 무반 관료를 6대 이상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무반가문임에도 무반 벌열가문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무반 벌열가문들은 무반 고위직 진출자가 많이 배출되는 동시에 왕실 또는 종실과 외척 관계를 이루거나 다른 무반 벌열가문과의 통혼 관계를 통해서 벌족화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무관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파계 내에 동반 관료가 포진되어 있을 때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기가 수월하였다. 대장직은 도성을 지키고 국왕을 시위하는 군영의 최고위직이었다. 그러므로 국왕의 측근이거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당대 핵심 동반 관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대장으로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파계 내에 핵심 동반 당상이 다수 존재하는 왕자군 파계 내의 무관가문에서 대장직이 주로 배출되었다. 화의군파의 경우에는 문과 합격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만큼 가능성이 적을 수밖에 없다.

327p

중인 가계가 왕자군파 내의 절손된 계통에 끼어 들어갔다. 18세기 이후 족보의 간행이 성행되면서 양반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족보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따라서 족보를 위조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전주이씨의 성관으로 활동하던 중인 가계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왕자군파의 가계와 연결시킨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343p

18세기 이후 국왕 자손이 귀해져서 종친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세도정치하에서 국왕은 왕실 후손의 단합된 모습으로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간 왕실구성원 중심으로 왕실보첩을 편찬하던 것을 <선원속보> 라는 형식으로 고쳐 대수에 제한 없이 왕실 후손 모두를 등재하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은 조선 초 왕실 후손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던 4왕 자손까지 왕실 후손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348p

외척의 직역 분포에 있어 명종비인 인순왕후 이후로 당상관 점유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태종의 외척 견제 정책이 효력을 상실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왕실이 핵심 관료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핵심 관료가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왕후를 배출한 가문에서 당상관이 양산된다는 것은 결국 외척이 주요 정치 세력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49p

조선 전기 왕후가문에서는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매우 저조하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왕후가문에서도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 문과 합격 이후 관계에 진출하는 것이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서 정국 운영에 핵심이 되는 관료 시스템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신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척족정치가 행해진 문정왕후 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14.5%이다. 17세기에는 왕후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대부분 25%를 넘으며,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70% 이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350p

문과에 합격한 이후에는 승진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아경 이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은 과거가 아니라도 25.8%는 당상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이야말로 핵심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부류였다.

352p

원친이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지속적으로 문관 관료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종친이지만 정치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야 한다. 종친은 원칙적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정이 있을 때마다 종친이 개입되어 있었다. 적절한 정치 참여를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종친의 지위에 있을 때에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야만 친진된 이후에도 왕실 후손이 기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 기반이란 다름이 아닌 문관 혹은 음관으로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여건 형성이다. 예를 들면 덕천군파의 이유간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음관으로 관직에 나갔다. 다행히도 그의 두 아들이 문과에 합격하면서 관료가문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유간의 경우 왕실의 친인척, 학맥 등의 네트워크가 폭넓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서인계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그 가문의 출셋길이 열렸다.

 화의군의 가문은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화의군이 정변에 연루되면서 가문의 문지가 약해서 무반 벌열가문과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파계 내에 문관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무반 벌열로 발전한 효령대군파 같은 경우는 갈래는 같지 않더라도 문관이 왕성히 배출되는 친족들이 있었다. 문관들의 후원이 전혀 없는 화의군파는 지속적으로 무관 관료가문이긴 했으나, 벌열가문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왕자군파 내에서 기술직 중인가문을 형성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모계가 천인이거나, 서얼인 경우 일시적으로 중인의 지위에 있을 수는 있다. 



<오류>

87p

정종의 장남 이원생은 언제 태어났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선생처럼 11세쯤 종반직이 처음 수여되었다면, 이원생은 1402년(태종2)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론이 맞다면, 1400년 정종이 동생인 정안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전해 줄 때에는 명실상부한 정종의 친자는 없었다.

->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1392년생, 1393년생,1399년생 아들들이 여럿 존재한다. 어떤 게 맞는 건지 좀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89p

고려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종의 아들들은 부정윤에조차도 제수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실록에서는 정종의 자녀들을 거론할 때마다 궁인 소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궁인의 소생들을 소군이라 하여 봉작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야만 하였다.

->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정종의 후궁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는 자매 사이로 고려 시대 재상을 지낸 지윤의 딸들로 나온다.

그녀들의 언니는 정종의 형 진안대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문벌가의 딸들인데 이 책에서는 전부 궁인으로 나오니 헷갈린다. 궁인이었다면 성빈이라는 직첩도 못 받았을 것 같다.

207p

장경왕후의 형제 윤지임이 인종의 외삼촌으로서 문정왕후를 견제하려다~

-> 장경왕후의 형제는 윤지임이 아니라 윤임이다.

256p

특히 이경여와 이이명은 조부와 손자로서 정승까지 올랐다. 이건명과 이이명 역시 6촌지간이었다.

-> 이경여의 아들 이민적은 작은 아버지 이정여의 양자로 갔고, 그 아들이 이이명이다. 이건명은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의 아들이므로 실제로는 4촌이고, 족보상으로는 6촌이다. 그런데, 이이명은 다시 이경여의 아들인 이민채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결국 둘은 6촌이 아니라 4촌이 맞는 것 같다.

283p

최승녕의 장남 최도일 역시 그의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냈다. 예종이 세자였을 때 소훈으로 간택되어서, 예종이 즉위한 후 공빈이 되었다.

-> 최씨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숙의가 되고, 예종 사후 성종 14년 1483년에 귀인에 봉해졌다. 공빈 최씨의 존재는 영조 대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위에 나온 최도일의 딸은 귀인 최씨이고, 전주 최씨 족보에 공빈 최씨라는 인물이 있어 그녀가 문종의 왕후인지 논란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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