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미술
서성록 외 지음 / 예경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종교개혁과 미술"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워 오래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상호대차시스템을 통해 빌리게 됐다.

미술보다는 종교개혁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표지의 개성적인 인물은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이다.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을 쓰고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던 시절의 루터이다.

흔하게 보는 초상화는 아니라 아주 인상적이다.

여러 저자들이 종교개혁 시대를 살아간 7명의 인물들에 대해 쓴 책이라 관점이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잘 갖췄다.

1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에도 당시 유럽의 격변기를 살다간 종교개혁가와 화가들을 예술사의 관점으로 잘 설명한다.

저자들이 개신교인이라 그런지,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적 교리를 화가들이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중점을 둔다.

루터나 칼뱅은 종교개혁가이니 그렇다 쳐도, 뒤러와 크라나흐, 홀바인, 브뢰헬,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이 개신교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다.

이들도 성서적 주제를 그렸지만 확실히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가톨릭 사회의 화가들과는 관점이 다른 것 같긴 하다.

나는 네덜란드가 중산층 시민 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면서 화가들의 미적 관점이 변했다고만 이해했는데 저자들은 이 화가들이 프로테스탄트적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종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루터는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구원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선물이자 은총이라고 했다.

루터는 종교예술을 거부하지 않았고, 칼뱅도 성상 숭배는 금지했으나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려는 인간의 예술적 본능은 긍정했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성인 대신 주변을 그리는 장르화가 유행한 것도 이런 이론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20p

루터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인 인간심리 과정의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술은 이러한 인간 성형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십자가와 성인들 같이 기념 및 증거를 위한 형상들에서 본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념과 증거를 위하여 그것들은 칭송할 만하고 귀중하다"고 보았다. 또한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은 성서의 글과 유사한 방법으로 교훈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53p

"우리는 정신에 의해 살고 그 외에는 죽음에 속한다"라는 명문을 적어 넣었다.

58p

크라나흐가 루터를 도우면서도 그와 적대적이었던 상대진영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그가 종교적, 정치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깊이 연루되기보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다양한 주류계층에게 선호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선제후로부터 귀족이나 왕족, 고위 성직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개인문장을 갖는 특권을 선제후로부터 부여받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61p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지고 누군가의 중재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됨을 나타낸다. 이는 가톨릭에서 성인이나 마리아의 중재와 개인의 선행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주장과 정반대된다. 루터가 오직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뤄진다고 한 것과 연결된다. 

67p

루터는 신앙고백이 신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영성체를 받게 하는 정화의식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스처도 아닌, 죄 있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에게 죄를 인식하고 용서를 바라는 것은 보상받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믿음을 갖게 되면 회개와 위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94p

칼뱅은 조국인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었다. 루터가 자신의 조국인 독일에서 영주들의 후원을 받아 교회개혁에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루터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개혁교회는 매우 진취적이다. 루터교회는 16세기 농민전쟁 때 독일의 영주들 편에 섰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독일 국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가톨릭 편인 프랑스 국가의 박해 속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칼뱅 자신도 제네바에 정착한 후, 그곳의 토착 귀족들과 치열하에 투쟁하면서 교회의 영향력을 키워 갔다. 이러한 초기 조건이 칼뱅을 따르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토들을 시민적명의 주도세력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99p

유아세례와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하여 심한 박해를 받은 재세례파도 마찬가지로 성상을 우상 숭배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루터교회를 제외한 유럽의 개신교회로부터 모든 성화와 조각이 제거되었다. 반면에 성화를 제외한 미술은 오히려 장려했기 때문에 개혁교회가 뿌리내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바로크 미술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101p

인문주의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고 종교개혁을 준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문주의가 중세 후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발견해 낸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수사학 전통이었다. 

103p

칼뱅은 하느님 자신을 묘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탁월한 은사들로 생각했다. 그는 예술이 죄에 의해 깨어진 세상보다 더 높은 현실, 즉 타락 이전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나타난 창조 세계를 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뱅의 영향 아래 당시까지 교회로부터 '세속적'이라고 비판받던 자연이나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회화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발전했다.

113p

네덜란드인들에게 미술이란 포장되어 팔리기에 충분할 만큼 작은 상품으로서 사고파는 시장 활동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작품을 팔기 위해 감상자층을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점이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며,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하고 서술적인 방식들을 선호하도록 했던 것이다. 

119p

"가감 없이 거기에 겨울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행복은 한동안 힘들어지거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부재는 불행이 아님을 상기하자

불행이 가능하다는 것, 불행을 생각할 수 있는 것

혹시 올 겨울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자

삶을 지속하거나 기다리기를 지속하는 것, 아니 기대를 품고 사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푸쉬킨 시랑 같은 맥락인가? 인생은 고단한 것이라는 정규재씨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브뢰헬이 매우 사실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농부의 현실을 묘사할 때조차, 화면에는 지긋이 배어 나오는 낙관과 소망의 정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뢰헬의 세계는 신비로운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존재의 심연에서 신앙의 뜨거운 열망이 식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123p

브뢰헬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화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고 구매하기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따뜻한 감성과 신랄한 태도, 천부적인 상상력을 통해 재현된 성서의 이야기와 도덕적 교훈을 즐겼다. 이는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저자의 죽음'이 보편적 담론이 된 시대에 예술가가 자신의 삶 자체로 쌓아 온 신뢰와 유대감의 힘, 곧 시민들에게 다가서고 교감하도록 했던 잠재력에 대해 새삼 환기하게 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야기했던 분열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족과 시민과 농민의 편에 서 있었다.

(브뢰헬이 과연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톨릭 성화 대신 농민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태어난 사회과 신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곳이고 구매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그림을 원해서이지 않았을까?)

124p

브뢰헬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진정한 예술에 내제될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역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이끈다. 모든 예술가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로시 세이어스의 말에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진정으로 창조적일 때, 예술은 그 자체로 개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그 주요 전제에 손을 올려놓고 세계의 토대를 흔들어놓는다. 그가 이런 위험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집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지성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임을 그녀는 확인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 자기 시대를 견인해 가는 힘, 인상파와 입체파 정도일까?)

125p

예술은 오로지 '자신만이 그 궁극'이라는 오만방자한 담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여 나와 창조의 심오한 근간인 시간과 영원이 한 인격체 안에서 화해되는 사건과 결부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 글은 왜곡된 규범과 혼란과 폭력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이자 어느 때보다 변화의 욕구가 높은 개혁과도기를 살았던 한 화가가 자신의 그리기를 통해 어떻게 창조적 지성을 구현했으며, 그것으로 어떻게 자신의 시대에 기여했던가 살피는데 그 의미를 두었다.

127p

화가의 관심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고 모든 계급과 지위의 사람들을 주제로 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은 그때의 인간관이 지위고하에 따른 신분 차별적 인간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민이 그림에서 주연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단순히 명석한 화가들의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조명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높고 가장 풍부한 계시'라는 통찰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런 인식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32p

렘브란트를 촉망받는 화가로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유력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사회 관계망을 넓혔다. 그의 출세를 귀족집안 출신 아내와의 결혼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아무튼 사스키아를 만난 덕에 그의 평판이 높아졌고 재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달라진 그의 위상은 자화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류>

65p

도판 설명 "코니크리크 박물관, 안트베르펜"

-> 코니크리 박물관이란 곳이 도대체 어딘가 했더니만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이었다. 

koninklijk 란 말이 loyal, 즉 왕립이란 뜻이었다. 이 정도는 번역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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