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제의 한화 정책과 낙양 호인사회 (반양장) - 북위 후기 호속 유지 현상과 그 배경
최진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전작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 나온 신간도 같이 읽게 됐다.

북위의 효문제는 수도를 산서성 평성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옮긴 후 적극적인 한화를 추진한다.

한화란 무엇인가?

호어 사용금지, 복성인 호성을 단성인 한성으로 바꾸기, 본적을 낙양으로 옮기기, 구 수도인 평성으로의 이장 금지, 장례 문화 변화, 수계혼 금지 등이 있다.

기존 학설로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한인 문화에 동화됐다고 알려졌는데, 저자는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위는 호인의 관습과 언어, 성명 등을 유지했다고 본다.

낙양으로 이주한 상층부는 비교적 한화 정책을 잘 수행했으나 그 기조가 하층부까지 완전히 내려온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북위는 한족에게 동화됐다고 해서 요, 금, 원, 청 같은 정복왕조가 아니라 침투왕조라 분류하는데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렵다고 본다.

왜 효문제는 천도를 하고 한어 사용을 강제하고 성까지 바꾸게 했을까?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완전하게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한족을 점령했으나 압도적인 한족 문화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일까?

지배 민족인 호인 입장에서는 황제의 이러한 강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효문제는 29세 때 낙양 천도 후 강력한 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33세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정책 기조가 완벽하게 시행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과는 반대로 문자를 만들고 자신들의 관습을 유지한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왕조가 대단해 보인다.

북위가 전국을 통일하기에는 역량 부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 책의 주제는, 낙양 천도 이후 북위 사회가 "한화" 된 것이 아니라, 호한융합 체제로 선비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56p

임성왕 원징과 광양왕 원연처럼 고위직에 올랐던 일부 종실제왕과 효명제 시기의 권력자 원차는 문서 작성을 부하들에게 하게 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호인 상층부에서도 한문과 문서 작성에 능한 인물들은 그 수가 제한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주영과 사적간처럼 북변에 거주하고 雁臣 생활을 했던 호인들은 한문의 독해와 작문 능력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3p

모용씨와 혁련씨, 저거씨는 16국 시대의 옛 황실 일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토욕혼씨도 북위 당시 독립국이었음을 보면 군주 씨족에 대한 견제책 혹은 우대책으로 호성 사용을 방치했거나 북위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호성 개칭을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해볼 수 있다.

105p

효문제의 한성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들에게서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졌고, 기타 지역의 호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호성 혹은 한성을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적어도 북변의 호인들은 본래의 호어를 사용했고, 호성을 사용했으나, <위서>의 편찬자 위수나 문서 행정을 담당했던 한인 관료들이 이를 한성으로 바꾸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룽멍 석굴 등의 조상기를 검토하면 북위 황실이나 훈신 팔성 등 호인 상층 지배층이 아니라 대부분 중하급 관리나 일반 호인들 사이의 호성을 사용한 예가 보인다. 지배층의 말단이나 일반 호인 가운데 일부는 상층 지배층과 달리 여전히 고유의 호성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이는 승진이나 벼슬에 관심이 없거나 도태된 일부 호인이었을 것이다.

120p

문제의 본적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에게 한정된 것으로 보이며, 기존의 견해처럼 호인의 분열과 정체성의 분화에 공헌했을 것이다. 모든 호인이 하남군 낙양현으로 본적을 바꾼 것은 아니었고, 본적 규정이나 선택에 유예 조항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126p

효문제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사한 대인들의 본적을 "하남 낙양인"으로 고쳤다. 이는 호인들의 본적을 하남군 낙양현으로 바꾸어 한인들과 같은 군현 표기의 본적 혹은 호적을 가짐으로써 호와 한의 구별을 없애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남 낙양인"인 이들을 구대인 혹은 대래 한인으로 지칭하거나 법률상 대천호 혹은 대천민이라 칭했던 예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외형상 "하남 낙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으로 간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2p

"오환 사람은 전쟁하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사람이 막 죽었을 때)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면서 슬퍼했지만, 장사를 지내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사자를 보낸다."

 인이 장례식에서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며 일종의 축제처럼 지냈음을 보여준다. 반면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장례식은 엄숙하고 애도를 표하는 것이므로 선비 등 호인의 풍습은 중국인에게 독특한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인 관료가 금지하도록 주청했을 것이다.

191p

한인 여성인 호태후가 활쏘기에 능했다는 사실은 '정숙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한인들의 윤리와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호인들의 상무적인 호풍이 궁중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30p

명문인 범양 노씨 출신이 형수와 성관계를 맺은 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것이 대대로 유학자 가문이었던 범양 노씨 집안에서 생긴 예외적인 패륜이기도 하지만, 유목민들의 수계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유학 사상의 수용, 특히 유가의 윤리와 도덕의 수용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적인 북위의 호인들이 중화가 되려면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 사상과 거기에서 파생된 윤리와 도덕의 체득은 필수적일 것이다. 

232p

북위 황실의 종실 제왕과 공주, 종실 일족, 훈신 팔성에 속하는 호인(선비인) 문벌 등은 가족을 중시하는 유가 사상의 윤리를 체득하지 못했으며 거리낌 없이 혼외정사를 벌였다. 이는 북위 후기에 일부 호인이 여전히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의 가족 윤리를 실천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47p

"남조의 부녀자들은 대개 교유하지 않으므로, 혼인한 후 양가 사이에도 십수 년간 서로 만나지 않고 오직 심부름꾼을 보내 문안하고 선물을 주어 공손함을 다한다. 반면 업하, 즉 북제의 풍속은 부녀자가 집안일을 모두 관장해, 쟁송의 곡직을 가리고, 세도가들을 방문한다. 항대(북위를 지칭)의 유풍인가?"

 안지추는 결혼한 여자가 교유하지 않고, 심지어 친정에도 자주 가지 않는 남조의 풍습과 북제의 풍습을 비교하면서 북제 시기 엽관 운동이나 각종 소송 등 북제 여성들의 치맛바람을 북위 시대의 유산으로 생각했다. 

251p

이처럼 중요한 의례에 호태후가 직접 참여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자신이 사실상의 황제임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황제와 맞먹는 용어를 사용하고 황제가 해야 할 의례를 직접 주관하는 호태후의 행동은 유교적 정치 이념이나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로는 설명할 수 없다.

 '2성'의 의미 변화는 풍태후 시기에 시작해 호태후 시기에 노골화된 '황태후들의 황제화' 시도로 볼 수 있다. 본래 중국식 의미에서 황태후는 황제의 나이가 어릴 때, 성인이 될 때까지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다. 

293p

선무제는 황후 고씨의 투기에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고황후는 선무제가 여성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 선무제가 죽을 때까지 선무제와 성관계를 맺지 못한 부인과 빈이 있었다. 따라서 선무제는 오직 아들은 효명제 1명만 남겼다. 선무제가 남성 중심의 유가 사상을 체득했다면 고황후의 투기를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선무제는 한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호속에 익숙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선무제는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한 다문화의 배경을 지녔을 뿐, 일방적으로 한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296p

북위 전기 근시관처럼 친위 부대인 영군부 장령들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남조와는 달리 문서 행정을 담당하는 중서성보다 황제를 지근에서 보필하느냐가 중요해졌다.

306p

재정수입 증대에 소금 전매제도가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염철전매가 폐지되었던 시기에는 재정수입을 확보할 수단이 적었으므로 재정지출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호태후는 개인의 사치와 불사 건축으로 생긴 재정 부담을 절약으로 해결하기보다 염지도장을 설치해 염지 감독을 강화하고 소금 전매 수입 증대로 과도한 재정지출로 생긴 재정 수지를 맞추려고 했다.

323p

우문귀가 공부보다 무예로 출세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상무적 기상을 강조하는 육진 출신 호인과 한인들의 일반적인 심리였을 것이다.

325p

십익건 시기의 법률은 멀리 부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돌궐과 실위, 거란, 여진, 몽골 등에서 살인과 상해, 간음, 도범 등의 범죄를 물자로 배상하는 법 문화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법률은 유목민들의 법률에서 영향을 받았고, 만주와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지> <형벌지>의 배상과 대속 규정은 유목민 법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서기 시대 유목민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27p

<불도를 공경하고 받들어 믿었음으로 아들에게 유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본향의 장법은 반드시 큰 말을 죽이니, 죽은 사람에게는 이익이 없다. 나는 마땅히 그 풍습을 그만두고 나를 시복으로 염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라.">

 "반드시 큰 말을 죽인다"라는 구절은 무천진 일대의 사람들은 장례식을 지낼 때 말을 죽여 순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요제희의 무덤에 말과 말의 머리가 발견된 것과 일치한다.

331p

문벌을 모칭하던 가문들이 해당 성씨의 본적이나 고거에 들어앉아 문벌임을 확인받으려 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이후 독고신 일가가 본적으로 표기한 하남 낙양현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장안 근처에 묻힌 것은 하남 낙양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독고신의 선조는 필자가 추정한 것처럼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하남 낙양인으로 본적을 바꾸라는 조치에도 무천진에 여전히 정거했으므로 형식적인 본적인 낙양에 대한 애착이 없었을 것이다. 

 독고신 일가처럼 실제로는 북위 말에 낙양에 거주하지 않고 북변에 거주했지만, 하남 낙양을 본적으로 표기한 호인들이 빈출한다.

365p

낙양에 거주했던 서역인과 낙양에 영향을 준 서역 문화는 낙양에 한인과 한문화만 존재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환기시킨다. 서역 문화는 호인(유목민)들이 한인과 한문화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 사람들이 낙양에 거주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퍼뜨렸다. 따라서 북위의 호인 지배층이 일방적으로 한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낙양이었다.

368p

유가의 사상과 윤리 수용을 '한화'의 기준으로 본다면 호인들은 '한화'되지 않았고, 본인들의 윤리와 도덕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이민족(미개인)으로서 금수와 같은 행위를 했다는 화이론적 평가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태후는 유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정숙한 한인 여성'이 아니라 각종 호속을 따른 '호화된 한인'이었다. 호태후는 임조칭제를 하는 태후를 넘어 황제처럼 행동했고, 아들 효명제 대신 제사를 주관했으며 유가 의례와 예절을 무시했다. 또한  과부인 호태후는 남편 선무제의 동생 청하왕 원역, 정엄, 이신궤, 양화 등과 정을 통했다. 

 효문제는 각종 '한화 정책'을 선포한 후 낙양에서 실행 여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잦은 순행과 남제 친정에 참가하면서 장기간 낙양에 거주하지 못했으므로 '한화 정책'의 감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낙양에 체류한 호인들이 효문제의 눈치를 피해 호속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호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호어 금지, 이장, 본적의 개칭, 낙양 천사 등 '한화 정책'의 중요한 정책과 명령에서 예외 규정을 두었다. 특히 호어 금지는 30세 이상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고, 조정 혹은 조정의 특정 장소로 해석할 수 있는 조당 안으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효과가 적었다. 또한 재정적으로 '한화 정책'을 추진할 재원이 부족했다. 남조의 남제와 양과의 전쟁 때문에 전쟁 비용이 증가했고, 선무제와 호태후가 불사 건축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유가의 예제 건축이나 증축, 개보수에 써야 할 비용이 부족했다. 따라서 '한화 정책'의 상징이자 유가 문화의 정수인 명당, 태학, 국자감은 제대로 건설되지 않았거나 보수되지 않고 황폐하게 버려졌다. 이어서 당시 한랭기였던 기후는 목축을 할 수 있는 지역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낙양 거주 호인들에게 양털과 양젖 등 의식주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랭한 기후 때문에 추위에 강한 호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371p

18세기부터 만주문자는 문화 상징으로 변해 만주인들의 정체성과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청 말까지 유지되었던 팔기제도는 만주인들의 귀속 의식을 공고히 했고 만주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만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팔기를 우대하고 만주어의 위상을 제고했으며, 만주인의 기질을 유지하고 할하 몽골을 복속시키는 전략으로서 대규모 사냥을 자주 벌였다.

374p

<위서>는 낙양시대 호인들의 호속을 기록하기를 꺼렸고 마치 한화된 것처럼 기록했다.

378p

효문제의 통혼 정책은 북위 황실과 기존에 존재하는 한인들의 문벌권과 통혼권에 끼어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성등급이라는 문벌에 소외된 한인 관료들을 끌어들여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류>

293p

원탄(선무제의 이복형제 함양왕 원희의 아들)

-> 함양왕은 선무제의 아버지인 효문제의 이복형제로, 숙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