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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
쳉후이 지음, 권소연 외 옮김 / 네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23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우리나라 역사 스페셜 수준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무조건 외웠던 요나라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TV 다큐를 책으로 낸 것이라, 밀도면에서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거란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택일 것 같다.
확실히 중국은 한족 중심에서 다민족 국가로 선전을 바꾸려고 하는 것 같다.
위구르나 티벳의 독립을 탄압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고,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관대한 자세라면 이들의 역사를 품어 보편제국으로써 내연이 확대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현재 중국의 태도를 보면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다.
(소국 대국 타령하는 국가 지도자를 가진 나라니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다)
요나라의 창시자 아율아보기가 사망하자 황후 술률평이 오른팔을 자르고 순장 대신 그 팔을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완황후라는 무서운 별칭이 생겼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소작, 즉 경종의 황후이자 성종의 생모는 한족인 한덕양과 사실혼 관계였고, 심지어 성종이 부친으로 우대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남편을 따라 죽는 순장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술률평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가 의아하다.
또 성종의 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후궁 소누근이 낳은 흥종이 즉위하자 핍박받아 자진하고 만다.
궁녀 출신인 소누근은 흥종이 16세로 왕위에 오르자 전권을 휘두르고 심지어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는 음모까지 꾸민다.
조선 같으면 아무리 왕을 낳은 생모라 해도 대비로 추존될 수 없고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는데 유목민족의 관습이 참 신기하다.
이를테면 정조가 왕위에 올랐어도 생모인 혜경궁은 대비가 아니기 때문에 며느리인 효의왕후보다도 모든 의절에서 뒷자리였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청나라의 서태후도 정궁인 동태후를 핍박해 죽이고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인가?
거란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런 가벼운 교양서들이 많이 발간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51p
아율아보기가 별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술률평은 중요한 고위 관료들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들은 돌아가신 황제가 그리운가?"
"돌아가신 황제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를 보러 가라"
술률평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자 아보기와 생사를 같이한 문무 중신들은 반박할 여지도 없이 참수되어 순장되었다. 대신들은 무고하게 살해되었고, 그들의 식솔들은 속수무책으로 울고불고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과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마땅히 나를 본받아야 한다!"
59p
거란군대는 기병을 위주로 하고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줄곧 사용해왔다. 개봉을 점령한 후에 거란 군사들은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는 중원 사람들의 강력한 반항을 불러일으켰고 야율덕광은 3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모친이 그립다는 명분으로 초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봉을 돌아보며 야율덕광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나는 중원 사람들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줄 몰랐다!"
88p
목종은 보기 드문 황제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도리어 여색은 좋아하지 않았다. 사료를 보면, 그가 총애한 그 어떤 여인의 기록도 없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도 없었다. 목종의 성격은 괴이하였다. 이는 그의 선천적인 성 불능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성격은 괴팍하고 냉혹하며 심리 상태는 변태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온 정력을 술 마시는데 쏟았기 때문에 술 마실 때에는 병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146p
이는 수레에 장막을 친 것으로 사람이 안에서 살 수 있었다. 조리용은 소작과 한덕양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같은 줄에 앉아있는 것이다. 만약 부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태후와 '나란히' 앉겠는가? 태후 또한 신하와 '나란히' 앉으려고 하겠는가?
153p
그는 중원왕조는 무력은 약하지만 문화는 발달했다는 점과 장기적인 대처는 거란국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전연의 맹약을 맺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덕양은 승천태후의 신임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승천태후에게 충성하여 그녀만을 사랑했고, 거란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다.
180p
소누근은 큰아들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흥종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아프하지 않았다. 흥종의 황후 소달리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옆에서 냉정하게 "너는 아직 나이가 젊은데, 구태여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했다.
199p
소관음은 도종에 의해 죽기 전 <절명사>를 지은 뒤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그녀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내가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찌 이 순간을 두려워하겠는가?"
황태숙의 반란을 경험한 도종은 집안싸움으로 '활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는 새'처럼 되었다. 그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모의하는 사람이 있을까 언제나 근심하였고, 특별히 가까운 친족을 더욱 의심하였다. 야율을신은 그러한 도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를 이용하여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한 것이다.
202p
생산력 수준이 아주 낮은 당시의 형편에서 많은 노동력이 사회 생산에서 이탈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헛되이 이런 무리(승려)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것이 거란국 후기 백성과 조정 사이의 모순을 날로 첨예하게 만들었다.
지나친 불교 숭상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 하는 거란 민족의 정기를 잃어버리게 하여, 대요 제국의 흥망성쇠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217p
거란 왕조는 국내의 여러 민족을 비교적 잘 융합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의 농업 지역을 확대시켰고, 장성 밖 유목민족의 정치이념과 문화사상, 사회습속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중화민족의 정체성 형성을 촉진하였다.
학자들은 요 왕조가 이후의 금, 원, 청 같은 유목 왕조가 장성 밖에서 흥기하고 중국의 각 민족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에 저항할 수 역사적 기초를 다졌다고 생각한다.
근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눈길을 장성 밖과 이미 사라져버린 요나라로 돌리고 있다. 사람들은 일찍이 초원에서 말달리던 저 영웅적인 민족을 잊을 수 없다.
225p
최근 중국 문명주의의 확장에는 장성 북쪽의 유목민족과 남쪽의 농경민이 투쟁과 교류를 통해 서로 혈통적, 문화적, 제도적으로 뒤섞이는 과정에서 중국의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인식, 다시 말하면 한족 위주의 중국 역사상에서 탈피하려는 인식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중국을 지배한 거란족은 중국역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