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 근세 초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4
김원중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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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분량이 작으면서도 역사의 여러 주제에 대한 쉽고 깊이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괜찮은 기획물 같다.

홍보가 많이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살림 문고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보다 훨씬 깊이있다.

왜 대항해 시대는 서유럽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일까?

특히 포르투갈은 당시 유럽의 부국도 아닌데 말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피레네 산맥으로 가로막혀 지중해 무역에서 이탈리아 등에 밀린 상태였고 특히 에스파냐는 국토 회복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때라 유럽 대륙 내에서의 확장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의 결단은 놀랍다.

과학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에 모험심을 갖고 바다로 나가게 한 지도자의 리더쉽이 나라를 중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빈국이었기 때문에 해상 무역을 위한 상관을 건설하고 이익을 얻고 싶었을 뿐 후발주자인 서유럽처럼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희망봉을 돌아 찾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함부로 점령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의 힘을 밖으로 팽창시키려 한 에스파냐는 운좋게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체제가 후진적이었던 인디언들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무역할 제품들이 많았던 반면,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상품이 부족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은광을 개발하고 대농장을 직접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디언들의 몰락으로 에스파냐인들의 잔혹한 학대 등을 거론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책에 나온대로 천연두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마치 유럽 인구의 30%가 흑사병으로 쓰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점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37p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이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오랫동안 사회의 필수적인 구성원이었고 예술, 상업, 지식에 지대한 기여를 해 온 유대 인과 무슬림들을 추방하거나 강제 개종시킨 일은 비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근절하려는 에스파냐 사회의 종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다. 또 에스파냐는 좁은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 세계인 북아프리카와 대치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 튀르크 이슬람 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벨 여왕이 대이슬람 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콜럼버스를 지원해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위해 해외 팽창을 생각하게 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5세기에 종교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정치 혹은 무역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종교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인들의 팽창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종교적 확신, 이슬람을 타도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킬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그들의 신념은 확신을 가지고 해외 모험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좀 더 신중하고 실용적인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은 그것을 무모하고 별로 실소득이 없는 사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종교가 왜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해외 팽창에서 중요한 요인이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58P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궁정과 도시 국가들은 부와 예술적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멋진 건물을 건축하고, 위대한 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지역의 '발견'과 팽창을 위해 쓸 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이런 내향적인 경향과 자기만족은 그보다 더 가난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모험적일 수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15세기 말~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외침과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내분으로 분열되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각축장이 되었고, 이탈리아 소국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야심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에 비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네덜란드와 영국 등 북서 유럽 국가들은 보다 통일되고 경제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좀 더 안정되고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66p

처음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해안 지역을 습격해서 얻을 수 있었으나 148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 국가 혹은 무역업자들과 포르투갈 간의 교역의 일부로 공급되게 된다. 즉 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붙잡아 포르투갈 인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공급되었다. 

(아프리카는 무조건 유럽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만 인식되는데 자국민들 노예로 팔아넘긴 이런 행태는 좀더 비판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 같다)

69p

다가마의 항해가 있고 나서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 무역을 거의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무력에서의 우위 때문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 외에도 당시 이 지역에는 포르투갈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만한 어떤 단일한 해상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포르투갈 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늘어선 작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포르투갈 인들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이집트와 페르시아는 강국이었으나 둘 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도양에는 정규적인 함대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는 더 강국이었지만 이 무렵 중국은 더 이상 인도양 해역에 관심이 없었다.

72p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어디에도 대규모 영토와 다수의 인구를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지배, 그러니까 아시아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지배라고 할 만한 현상이 시작되는 것은 포르투갈에 의해서가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의 자바 지배, 에스파냐 인들의 필리핀 지배에 의해서였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가졌던 관심은 수지맞는 해상 무역 제국의 건설과, 그것의 안정적인 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을 유지할 만한 자원도, 병력도,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단지 가끔 자신들의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지 지역 세력들 간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주들 혹은 세력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

 유럽의 빈국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들이 15.16세기에 건설한 해외 제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일련의 요새와 상관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해역에서 중국의 명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 등 가공할 적수들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이들 열강들은 강력한 육군에 의해 유지되는 육상 제국이었고, 자국의 부의 원천이 해군과 대외 무역이 아닌 농업과 국내 교역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굴 제국과 명의 황제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자신들의 이해와 별 관계없는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물리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 또한 그런 강력한 아시아 국가 지배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처신했음은 물론이다.

97p

에스파냐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땅과 재산 모두를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정복 대상이었다. 당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을 포함하여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점령한 '이교도들'의 땅에 대해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교도만이 영토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원칙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발견한'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은 그 소유권을 현실화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로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99p

콜럼버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카리브 해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했던 수지맞는 교역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토 내륙에 사는 훨씬 개화된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볼 때 아메리카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오로지 금광과 은광, 진주 어장, 비옥한 토양뿐이었다. 이것들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몇몇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하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복과 식민지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던 것이다.

111p

탐욕스럽고 거칠고 강인했던 그들은 비록 끝까지 살아남아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 부를 얻기 위해 인디언들과 낯선 환경과 기후에 맞서 싸우면서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밀림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정복자들은 저마다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모두 강한 개인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인디언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메리카 정복은 바로 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35p

인디언의 몰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자주 이른바 '흑색 전설'로 설명해 왔다. '흑색 전설'이란 주로 영국 미국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생겨난 것으로, 에스파냐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과장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 인들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단히 잔인하게 대했으며, 그런 학대를 못 이기고 많은 인디언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당시 에스파냐 인들이 인디언들의 노동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고, 인디언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과도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유럽인들이 의도하지 않게 아메리카로 들여와 면역력이 없는 주민들 사이에 들불처럼 확산되었던 천연두 같은 '유럽의 질병'이 인디언 인구의 궤멸을 가져 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아마도 인구 감소의 주원인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역병이었을 것이다.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앗아간 흑사병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40p

"거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그것의 끊임없는 확대는 유럽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전례없는 기회와 자극을 제공했고,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새로운 부와 자본이 축적되고 새로운 근대적 기업 형태가 나타나고 금융업은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시민 계급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항해 시대는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해양 팽창은 19세기에 현실화된 유럽의 세계 지배를 불가피하게 만든 요인이었는가?

 유럽이 적극적으로 해외 팽창을 한 것은 사실이고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의 지배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16세기의 대항해와 19세기 유럽의 세계 지배 간에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대항해가 시작될 무럽 부와 군사력, 과학 기술은 모두 중국과 이슬람권 등 아시아 세계가 우위에 있었고, 그 상태가 300년 가량 유지되었으며 19세기에 가서야 세계 경제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 갔다는 설명이다. 그 근거로 유럽 인들이 해외 팽창에 나설 무렵 세계의 많은 문명권들이 모두 나름대로 팽창을 시도했다는 점, 1800년까지 세계 인구의 2/3가 아시아에 거주했고 (그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1775년 경 아시아가 세계 생산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생산성도 더 높았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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