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가? - 고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2
정기문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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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지식의 정원> 시리즈는 문고판이면서도 내용이 참 알차다.

전문 필자들을 잘 선정하여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살림문고 같은 얕은 수준이 아니라 전공자들의 역사 해석이 수준있는 교양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번 책의 주제는 로마가 강대국이 된 비결이다.

로마의 멸망에만 초점을 맞췄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한 편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넘어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으로 뻗어가는 과정에서 제국으로서의 보편성을 유지한 것이 천 년 제국의 비밀이 아니었나 싶다.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나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수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정복한 땅의 피지배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식민지에서 황제가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개방성을 가졌던 것 같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사분한 것도 넓어진 땅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유연한 발상이었고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게르만 용병도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음을 보여준다.

최종 결과만 가지고 가볍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널리 퍼져 국교가 된 것도 하나의 제국으로서 무역과 교류의 폭이 넓었고, 박해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단순히 법률과 건축 유산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제국이 바로 로마가 아닌가 싶다.



<인상깊은 구절>

27p

왕정을 실시했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왕권은 하늘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왕들은 인민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의 통치를 판단하다고 생각했고, 인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로마는 인민의 동의가 있어야 왕권이 성립된다고 생각했으며, 이 생각은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따라서 로마는 이미 왕정 시대에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주권 재민의 원리를 확립했고, 후대 민주주의의 한 원칙을 수립했던 것이다.

35p

이렇게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된 공화국은 '레스 푸블리카'라고 불렸는데, 이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인들은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인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참으로 선진적인 것이었다. 근대 초의 서양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면 나라들이 통합되거나 쪼개진다. 당시 유럽인들은 국가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국왕의 사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보면 로마인들이 정치 분야에서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47p

로마는 정복한 지역을 동화시키고 전열을 정비하는 작업을 마치기 전에는 또 다른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로마는 어떤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 사람들을 로마인이나 최소한 친로마 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 작업이 끝나서 새롭게 인적 자원이 보강된 다음에 다른 지역을 정복하였다. 따라서 로마의 정복 작업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진행되었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56p

이 책은 너무나 뛰어난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최대 업적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갈리아 전기>를 쓴 것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라틴 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교본으로 삼고 있다.

63p

민주정이 잘 운영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더욱이 제국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당시의 행정력으로서는 민주정을 펼칠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일단 정치가 안정되고, 로마의 군사력이 복원되자 로마는 중흥하기 시작하였다.

75p

포카스는 아마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칭하면서 로마 인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인이 진정한 로마 인이며 독일인은 롬바르드인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니케포루스 포카스 황제의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래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고, 로마 황가의 혈통이 단절 없이 이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편의상 동로마 제국, 혹은 비하해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제국은 로마 제국의 연장이 아니라 로마 제국 그 자체이다. 즉 로마 제국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한 시기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의 역사를 2200년으로 파악해야 하고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 또한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포함시켜야 한다. 물론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해도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긴 역사 동안 로마 제국이 인류에게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를 살펴보자.

131p

<로마가 함대를 갖추고 무장해야 하며 시민들이 수병들에게 급료와 물자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먼저 부담을 집시다. 원로원 의원들이여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인 반지를 제외한 모든 금, 은, 주조한 동전을 모두 내일까지 국가에 바칩시다. 국가를 잃는다면 개인들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위기에 처한 로마는 세금을 내라는 포고문 하나 발표하지 않고 해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바치지 않았다면 로마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지배층의 도덕성, 리더십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63p

로마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신분이 높은 자들이 당연히 용감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용감히 싸웠다면 설령 패배했다고 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패배한 장수를 심하게 문책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패배한 장수의 임무는 자살하거나 문책을 두러워하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병사들을 수습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16년 8월에 있었던 칸나이 전투의 뒤처리는 로마 인들의 이런 성향을 잘 보여 준다. 이 전투에서 로마는 약 9만 명을 병사로 5만 명밖에 되지 않는 한니발군에 대패하였다. 명장 한니발의 지도력과 한니발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7만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인들은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투에서 지난해 콘술, 그해 콘술이었던 수많은 지도자들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총사령관이었던 바로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했을 때, 모든 시민들이 로마 성문까지 가서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가 '나라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도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로마는 무능한 장군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카르다고와는 정말 다른 태도를 취했고 그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한 패잔병의 사령관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눈물나는 대목이다)

175p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대인들은 모두 각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로마인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으며, 인간은 신들이 정해 놓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원래 고대 세계에서 종교는 도시의 사회 및 정치 생활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신들을 경배하는 것이 공동체의 안녕을 보장하고, 시민들의 유대를 강화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각 도시나 공동체는 그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모든 고대인들이 신들을 믿었고, 신들이 세상을 주재한다고 믿었지만 로마 인만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고 신들을 모시는 데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로마 인들은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모든 일을 신에게 물어본 다음에 했다. 과연 이것이 로마의 세계 정복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종교가 인간에게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것이 그 답이다. 전투를 하기 이전에 신에게 뜻을 물어보았고, 신이 전투를 허락했다면 병사들은 신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을 갖는다. 전투에 임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로마 인들의 심성을 이해한다면 왜 키케로가 로마의 성공 비결은 투철한 신앙심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4p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로마 인들이 법을 너무나 좋아했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발달시켰기 때문에 종교적인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현대인의 관념이나 편견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로마인의 종교 생활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면 이런 평가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와 정치, 종교와 학문, 종교와 일상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는 종교 고유의 영역이 있어서 다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인은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야말로 그들에게 모든 것이었다. 종교는 믿는 자에게 강한 자부심과 확신을 주고, 믿는 자는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로마인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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